십 년 전쯤 일이다. 노량진에서 공무원 수험 생활을 하던 때였다. 스트레스 없이 생활한다고 생각했는데 '두통'이 시작됐다. 책만 펴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도저히 책상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병원을 찾았다. 정신과였다. TV에서 봤을 때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만이 찾는 곳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그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정신과에 찾아가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우선 병원비가 너무 비쌌다. 10분 정도 상담을 받는데 5만 원 정도를 지불했다. 넉넉지 못한 수험생 신분에 감당하기 힘든 금액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의사 선생님은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방도 없었다. 그냥 내 이야기를 듣기만 하고 중간중간 '추임새' 대답을 할 뿐이었다.
"제가 수험생인데요. 잘 몰랐지만 스트레스가 있었나 봅니다"
"네"
"고시원 생활을 하고 있는데요. 누우려고 발을 뻗으면 머리 끝과 발끝이 닿을 정도로 좁고요. 창문도 없어서 답답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군요."
몇 번의 상담을 받고서 정신과 치료를 그만두었다. 특별한 처방도 없는데 비싼 상담료를 지불하는 게 너무 아까웠다. 그 후로도 얼마간 두통이 지속되다 멈췄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신과 의사 선생님은 내 안의 스트레스를 끄집어내도록 질문을 던졌던 것 같다. 두통 해소하는 법을 일러 준 것이 아니라 두통을 일으키는 원인을 스스로 깨닫도록 조력자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마음속 고통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이 그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이고 어느 정도 정돈이 되어 있다는 뜻이다. 삶의 시행착오 또한 마찬가지다. 나의 실패를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안에서 무엇인가는 찾았다는 의미일 수 있다.
모든 일은 시차를 두고 다른 사람에게 나타난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 아픔을 드러내는 일은 누군가에게 내 품을 미리 내어주는 일이고, 내 시행착오를 드러내는 것은 누군가에게 내 계획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다.
드러내자. 아픔과 시행착오를 드러내는 일은 나에게는 치료제가, 타인에게는 백신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