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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 생각남 Jan 22. 2021

누구나 작가다, 단지 쓰지 않을 뿐


“양 한 마리만 내게 그려줘.”

어린 왕자가 말했다. 생텍쥐베리에게 말했다.

“아니! 이건 너무 병들었어.”
“이건 양이 아니잖아. 이건 염소야.”
“이건 너무 늙었어.”

까다로운 어린 왕자를 맞출 수 없었던 생텍쥐베리는 귀찮다는 듯 어린 왕자에게 ‘궤짝’ 하나를 그려줬다. 그 안에 양이 들어있다면서. 그제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았다는 듯 어린 왕자의 표정은 밝아졌다. 어린 왕자는 ‘정형화’된 양보다 자신의 생각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는 ‘융통성’ 있는 양을 원했던 것 같다.


김밥 먹는 영상만 촬영해서 올리는데도 조회 수가 수십만 회나 되는 인기 유튜버가 있다. 바로 ‘독거 노총각’이다. 그의 콘텐츠는 단조롭다. '오늘은 김밥을 먹었다', '오늘은 햄버거를 먹었다', '복숭아를 샀다, 맛이 없었다' 그는 3천만 원짜리 아파트에서 혼자 끼니를 때우며 지내는 일상 이야기를 한다. 그의 화두는 두 가지다. 끼니와 여자. 45년 동안 모태 솔로로 살아왔다는 독초 노총각은 여자 없이도 혼자서 밥도 해 먹고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자신을 다독인다. 괜찮다며 꺼내는 이야기는 여자 이야기뿐이다.

구독자들도 독거 노총각의 마음을 읽었는지 이런 댓글을 올린다.

“아마 전 세계 유튜버 중 가장 여자에 환장한 유튜버가 아닐까 싶습니다 형님”


독거 노총각도 부정할 수 없었는지 이 댓글을 베스트 댓글로 최상단에 고정해놨다.

그는 유튜버로 그리고 작가로 다시 태어났다. 그는 유튜버판 ‘나 혼자 산다’의 배우이고 작가이고 감독이다. 내레이션 대본을 쓰고 촬영을 직접 한다. 거친 영상과 두서없는 대본이지만 수십만 명의 구독자는 '좋아요'를 누르며 그를 응원하는 댓글을 올린다. 독거 노총각은 1인 가구 시대 외로운 남성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은 것이다. 자신의 처지와 생활을 가감 없이 보여주면서.

한 작가는 말한다. 정체성에 대한 인정은 특정한 서사에 대한 인정이 아니고. 서사의 편집권에 대한 인정이라고. 양을 원하는 어린 왕자에게 그가 원하는 양을 스스로 볼 수 있는 꿰짝을 그려준 것처럼. 낡은 아파트에서 홀로 처량하게 김밥 먹는 장면으로 전국의 수십만 노총각을 응원하는 정체성을 만든 독거 노총각 유튜버처럼.

삶은 정해져 있지 않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기에 따라 삶의 정체성은 달라질 수 있다. 누구나 자기 인생의 저자다. 그러나 평생 한 줄도 쓰지 않는 저자가 있고 내 삶의 구석구석을 글로, 영상으로 만들어내는 다작 작가들이 있다.


누구나 작가다, 단지 쓰지 않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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