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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하면 어때? 황금 같은 내 인생인데

by 오늘도 생각남

“오늘따라 왜 이리 힘들까요? 사기도 떨어지고. 티는 안 냈지만 유독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은 날...”


단톡 방에서 지인이 고민을 토로했다. 문장 문장에서 묻어나는 삶의 무게가 핸드폰 너머로 전해졌다. 가만히 문자를 보고 있는데, ‘인조인간’처럼 지냈던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34번! 한번 읽어봐 “


고등학교 시절 한 반 인원수는 50명이 조금 넘었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이름을 다 기억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보통 이름 대신 번호를 불렀다. 34번이었던 나는 이름 대신 ‘34번’으로 불렸다. 선생님들이 학생들 이름을 기억하는 집단은 두 부류였다. 공부를 잘하는 성적 상위 그룹과 말썽을 자주 피우는 주의 요망 그룹. 나는 공부를 잘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사고를 쳐서 선생님을 걱정시키지도 않았다. 나는 특별할 것 없는 관심 밖 34번이었다. 내 짝꿍은 공부를 잘했다. 게다가 성격도 쾌활해서 선생님들의 귀여움을 받았다. 선생님들은 그 친구의 이름을 불러줬다. 인생의 롤 모델로 생각할 만큼 좋아했던 국어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 선생님도 내 짝꿍에게는 이름을, 나에게는 번호를 부르셨다. 좋아하는 사람에게조차 존재를 인정받지 못했던 나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철인 34호. 나는 그냥 인조인간 같았다. 공장에서 수없이 찍어내는 대체 가능한 여러 인조인간 중 하나. 국어 선생님께는 친한 척도 하고 존경하는 마음도 표현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시절 ‘공부를 잘하지 못한다’는 결핍은 내성적인 나를 더 주눅 들게 만들었다.


그 이후로도 ‘공부 못하는 아이’라는 결핍과 내성적인 성격은 내가 하고 싶은 행동들을 가로막았다. 평소 모의고사 점수보다 수능 점수를 못 봤던 나는 서울에 있는 재수 종합학원을 다녔다. 재수 학원의 한 반 학생 수는 100명이 넘었다. 재수학원 개별 과목 선생님들이 학생들 이름을 기억하는 건 고등학교 시절보다 두 배는 더 힘든 상황이었다.


재수학원에는 유쾌한 화학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통통하신 풍채에 얼굴에는 반쯤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별 농담 아닌 말도 화학 선생님이 말씀하시면 그냥 웃겼다. 재수생이라는 불확실한 신분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며 1년을 지냈지만 화학 수업시간은 몇 안 되는 힐링 시간이었다.


수능시험이 끝나고 재수학원에 갈 일이 없었다. 대학 입시원서 작성을 위해 잠시 학원에 들를 일이 있었는데 학원 복도에서 화학 선생님과 마주쳤다. 볼록 나온 배를 내밀고 옆구리에는 책을 낀 채로 걸어가시는 모습이 수업을 하러 가시는 듯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할까 하다가 나를 기억 못 하실 것 같아 조심히 옆으로 비켜섰다. 그런데 지나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화학 선생님이 웃으며 한 마디 던지셨다.


임마, 인사도 안 하냐. 시험은 잘 봤어?”


선생님은 나를 기억하고 계셨다. 100명이 넘는 학생 중의 한 명이었던 나를. 선생님이 나에게 말을 거는 순간, 흑백으로 처리돼있던 내가 칼라로 바뀌는 기분이 들었다. 나를100명의 흑백 장면에 넣어두고 있었는데 화학 선생님은 나를 ‘칼라’로 보고 계셨던 것이다. 화학 수업이 끝나고 몰랐던 문제를 몇 번 질문드린 적이 있었는데 그 기억을 하고 계신 듯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선생님)이 나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상대방(선생님)을 기억한다는 사실이 중요한데 내 마음을 너무 하찮게 여겼구나 하는 생각. 공부 좀 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수능시험이 끝난 당일 저녁, 수험생 자녀가 있는 모든 집은 회식을 한다. 공부를 잘했든 못 했든 시험을 잘 봤든 못 봤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온 가족에게 고생했다는 위로와 응원을 받는다. 그것은 수험생 모두가 누군가의 ‘금쪽같은 새끼(자식)’이기 때문이다. 옆집 아이가 자기 아이보다 공부를 더 잘한다고 옆집 아이를 더 사랑하는 부모는 없다. 외모도 마찬가지다. tv에 아무리 잘 생기고 예쁜 국민 아역배우들이 나와도 내 새끼만 못한 법이다.


금쪽같은 ‘내 새끼’ 자리에 ‘나 자신’을 넣어보면 어떨까? 나도 우리 아빠, 엄마한테는 ‘금쪽같은 새끼’니까. 공부 좀 못하는 나, 성격 좀 내성적인 나, 외모 좀 뛰어나지 않은 나, 남들보다 크게 내세울 것 없는 나, 온갖 결핍으로 똘똘 뭉쳐진 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시작점이자 미워할 수 없는 기본 값. 그래서 누가 뭐래도 ‘황금 같은 내 인생’이고, 소중한 내 삶.


그때 그 시절 좋아하는 선생님에게 34호로 불렸던 그 아이와 단톡 방에서 일상의 무게를 공유한 지인에게 말해주고 싶다.


“좀 부족하면 어때? 그래도 황금 같은 내 인생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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