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표현은 언제나 직구다. 어른들의 말처럼 에둘러 오는 경우가 없다. 발등의 뼈 골절로 지난 토요일 깁스를 했다. 난생처음 하는 깁스였다. 의사 선생님은 다친 발로 6주 동안은 절대바닥을 딛지 말라고 하셨다. 그래서 '목발'이란 것도 처음으로 사용했다. 깁스를 한 채로 목발로 낑낑대며 집 안을 돌아다니는 아빠를 본 준이. 아빠에게 '장애인이냐'며 물었다.
사선에서(현관과 거실 사이 경계)
준이가 '장애인'이란 단어를 배운 것은 마트 주차장에서였다. 마트 주차장에서 비어있는 장애인 자리를 피해서 주차공간을 찾는 아빠에게 준이가 물었다. 휠체어 그림 그려진 저 자리는 뭐냐고. 왜 그 자리에 주차 안 하냐고. '몸이 아픈 장애인들이 주차하는 자리라서 주차하면 안 된다'라고 대답을 했었다.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준이는 다리를 다친 아빠에게 '장애인이냐'고, '이제 장애인 자리에 주차 가능하냐'고 물은 것이다. 아빠는 다리 아파 죽겠는데 아드님은 참 천진난만.
나는 장애인인가?
준이의 물음에 선뜻 대답하기 어려웠다. 내가 지금 장애가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다리가 다 나으면 비장애인이 될 예정이다. 물론 다리가 낫는 과정에서 변수가 있을 수는 있다. 준이에게 장애인 여부에 대한 답변은 슬쩍 피하고 장애인 자리 주차에 대한 대답을 해줬다. 장애인 자리에 주차하려면 신청해서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아빠는 신청을 안 해서 주차하면 안 된다고.
난생처음 사용하는 목발은 불편했다. 아니, 너무 힘들었다. 힘껏 노를 저어야 앞으로 나아가는 배처럼 힘껏 목발을 짚어야 겨우 몇 발자국 나아갈 수 있었다. 목발을 끼운 겨드랑이에는 멍 투성이었다. 냉장고에 가서 물을 한 컵 마시는 것도 큰 일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들락날락했던 냉장고 앞은 땀을 뻘뻘 흘리며 이를 악물어야 갈 수 있는 험난한 곳이 돼있었다.
'다리의 중요성'도 다시 한번 느꼈다. 한쪽 다리만으로는 몸을 제대로 지탱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씨름을 하자'고 아빠를 졸랐지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깁스를 한 채로는 앉아서 '브루마블'게임을 같이 하는 것도 힘겨웠다.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던 왼발은 조용히 내 삶을 지탱해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대학교 동기 Y형이 생각났다. Y형은 뇌성마비를 앓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온몸이 심하게 흔들렸다. 걷다가 넘어지는 경우가 많아 이동할 때는 누군가의 부축이 필요했다. 같은 동아리였기에 나도 Y형을 부축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Y형은 '장애'에 관한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려줬다. 우리나라 장애인 대부분은 선천성 장애가 아니라 후천성 장애라는 사실. Y형도 초등학교 때까지는 비장애인이었다고 했다. 중학교 시절 어느 날 눈을 떴는데 갑자기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Y형은 그렇게 원인을 알지 못한 채 하루아침에 장애인이 되었다. 실제 본인의 경험담을 말하는 것이었지만 잘 믿어지지 않았었다. 눈을 떠보니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해있었다는 소설이 생각났었다.
사실 우리나라 등록 장애인의 94% 정도는 선천성이 아닌 성장과정에서 질병, 사고로 발생하는 후천성 장애라고 한다. 그 누구든 언제 어디서든 장애를 맞이할 수 있다는 얘기다. 눈을 떠보니 갑자기 몸이 뒤틀려 있었다는 Y형처럼.
생각해보면 장애와 비장애는 종이 한 장 차이다. 운이 나빠서 어느 날 갑자기 비장애인이 장애인으로 신분 전환(?)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만약 목발 도움 없이 두 발로 땅을 딛고 있다면 그 두 발에, 목발의 도움으로 삶을 지탱하고 있다면 소중한 그 목발에 감사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