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부상 환자에게는 여러 가지 고충이 있다.그 고충 중 하나는 씻는 것이다. 세수야 쉽게 한다지만 머리감기는 성한 다리에 상당한 근력과 몸의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목욕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할 수 있다.
입원 4일 차. 쌍둥이 아들(8살)들이 아빠를 보고 싶어 한다며 아내가 오후에 병원 면회를 오겠다고 연락해왔다. 아이들과 아내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도 잠시 나흘간 머리도 감지 않고 목욕도 못해 꾀죄죄한 모습에 걱정이 됐다. 둥이들은 아빠를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으로 생각해왔었는데 며칠 전 발등 골절로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는 약한 모습을 보인 것 같아 신경이 쓰이던 차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아이들에게 깔끔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 생각에 목욕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한 발로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됐지만 둥이들에게 말끔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 마음에 용기를 내서 목발을 짚고 샤워장으로 향했다.
첫 번째 관문 옷 벗기. 상의 탈의는 쉬었으나 하의와 속옷을 벗는 게 문제였다. 발목까지 내려온 바지와 속옷을 벗으려면 다리를 번갈아 들어야 했다. 그런데 발등 골절된 왼쪽 발은 바닥을 딛지 못해 계속 들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데 목발이 눈에 들어왔다. 발목에 있던 바지와 속옷을 목발을 이용해 벗겨냈다. 순간 목발이 내 신체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쭉 늘어난 가제트 팔처럼.
두 번째 관문 샤워실 입장. 목발이 젖을 수 있어서 샤워장 밖에 놓고 한 발로 콩콩 뛰며 샤워실로 들어갔다. 미끄러질세라 문 손잡이와 유리벽을 꼭 잡고 조심히 입장했다.
세 번째 관문 샤워 실시. 샤워장에는 빨간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나 같은 다리 부상 환자를 위한 도구인 것 같았다. 의자는 신의 한 수였다. 의자가 없었다면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어정쩡한 자세로 샤워를 해야 했을 것이다.
이제 좀 씻어볼까 하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샤워 레버를 돌리는데 물이 나오지 않았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아무리 돌려도 소용없었다. 순간 고민이 됐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옷을 다시 입고 간호사를 부르자니 챙겨 입는 것부터 다시 벗는 일까지가 까마득했다. 이대로 포기하고 옷을 입는 것도 너무 김새는 일이었다. 알몸 상태로 멍하니 고민을 하다 애꿎은 샤워 레버를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수도 없이 돌렸다. 신경질이 나서 레버를 눌러도 보고 당겨도 보는데...
쏴~ 물이 쏟아졌다. 마치 사막에서 갑자기 오아시스가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샤워 레버를 당겨야 물이 나오는 구조였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목욕을 끝냈다. 시간을 보니 딱 1시간이 걸렸다. 평소에 10분이면 끝나던 목욕이 1시간이나 걸리다니... 하지만 불가능 할 것 같던 일을 성공시킨 것에 대한 뿌듯함이 느껴졌다. 혼자 흐뭇해서 고개를 끄떡이고 있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장애는 '불가능'이 아니라 '불편'이구나
골절된 발을 든 채로 목욕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비록 평소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가능한 일이었다. 목발, 의자, 문 손잡이 등 도구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결국 해냈다.
'시간'과 '도움'을 더하니 불가능이라 생각했던 것이 가능으로 바뀐 것이다.
순간 영화 '말아톤'이 생각났다. 말아톤의 주인공 초원(조승우)이는 자폐아였다. 초원이의 엄마는 아들의 자폐를 고쳐보기 위해 아들에게 마라톤을 시켰다. 그리고 아들의 자존감을 키워주기 위해 달리기를 하기 전 주문처럼 아들에게 구호를 외치게 했다.
(엄마) 초원이 다리는?(초원) 백만 불짜리 다리. (엄마) 몸매는? (초원) 끝내줘요.
영화 속 이야기지만 자신의 다리를 백만 불짜리라 믿었던 초원은 42.195km를 완주하고 아주 환한 미소로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초원이의 마라톤 완주도 엄마의 꾸준한 기다림(시간)과 구구단처럼 외우게 했던 자존감 주문(도움) 덕이 아니었을까?
* 부록 : 둥이들이 아빠를 응원하기 위해 작성한 편지와 꽃, 그림 선물(아들은 아빠의 힘이다. 나에겐 이것이 가장 큰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