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라났다. 성인이 될 무렵, 오랜 시간 가까이 지내던 분이
어린이집을 개원하셨다. 대학도 어찌어찌 들어가 보니 비슷한 계열의 학과였고 졸업을 하면서 자연스레 그 어린이집의 교사가 되었다. 작은 마을에서 나고자란 내가, 작은 대학을 나와 작은 어린이집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마을도 작았고 생각도 작았다. 어린이집은 개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좋은 소문을 타게 되었다. 지역에서 규모도 커져갔고 '법인'이라는 이름도 달게 되어 나름 괜찮은 첫 직장의 모양새를 갖추어갔다.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도 좋았고, 내가 잘 해낼 수 있는 일들도 많았다. 만족스러운 생활이었다. 나를 그 길로 이끌어주셨던 원장님은 특히 '친절함'을 원 운영의 모토로 삼으셨다. 원을 선택하는 것은 '아이'가 아니라 '부모'였기에 부모님들께 최선을 다해 친절을 베풀자는 그런 의미였던 걸로 기억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과한 부분이 있었지만, 그때의 나는 어렸고 존경하는 어른의 논리이니 그게 맞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시작부터 수평하지 않았던 관계에서 머지않아 여러 가지 오류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아침 차량 지도를 나가면 엄마들은 저만치 서서 팔짱을 끼고 자기들끼리 수다를 떤다. 나는 불편한 옷에 불편한 신발을 신고 버스에서 내려 아무도 받지 않는 인사를 한다. 정장 스타일의 옷을 입으면 '저런 옷을 입고 애들을 어떻게 보는 거야?' 했고, 청바지를 입고 나가면 성의가 없다며 스스럼없이 뒷말들을 해댔다. 부스스한 머리에 슬리퍼, 아니 쓰래빠를 신고 서 있는 그녀들이 말이다. 발표회를 준비할 계절이 오면 '우리 애를 앞에 세우라'당당하게 말했고, 반편성을 할 때면 'oo 이와는 같은 반, OO 이와는 다른 반에 넣어달라'했다. 호이가 계속되면 둘리인 줄 안다고 류승범이 그랬던가, 그녀들의 요구는 그렇게 종종 선을 넘었다. 스트레스가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나이가 어렸을 때는 참을 만했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고, 나도 사랑이란 걸 하고 결혼을 하고 몇 년 후에 복직을 해 보니 그녀들의 나이가 나보다 훨씬 어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은 다른 방식으로 무례했다. 아이를 데리고 아파트 놀이터에 나가면 그녀들을 만나게 된다. 새로운 세대의 그녀들은 절대로 먼저 인사를 하지 않았다. 내가 다가가 조심스럽지만 경쾌하게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면, 그녀들의 대부분은 마치 오래된 CF의 한 장면처럼 예쁘지 않은 눈을 최대한 예쁘게 깜박이며, 누구시더라? 하는 표정을 짓는다.
'내가 언니니까 한 마디 할게, 너 나 진짜 모르니?'
손날을 곧게 세워 목젖을 한대 팍! 치고 싶지만.. '저, OO어린이집이요'하며 멋쩍은 미소를 건넨다. 그러면 또 두꺼운 검지 손가락을 최대한 요염하게 구부려 흘러내리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알았다는 듯이 '아아~' 또 CF를 찍으신다. 아, 브런치에 글 쓸 때 욕 써도 되나요. 그 당시 그녀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놀이터, 미용실, 슈퍼마켓... 조각난 내 자존감들을 작은 조각 하나 떨어트리지 않고 한데 모아 안고 돌아서며 생각했다.
'너네, 내가 누군지 알면 깜짝 놀란다'
나의 페르소나의 탄생, N 잡러의 시작. 나는 그녀들을 비난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내가 모르는 그녀들의 치열한 삶의 의미가 있을 것임을 존중한다. 다만 나는 조금 더 멋진 사람이 되기로 한다. 내가 누구인지 잊지 않고 성장하며 기록한다. 더욱 멋진 사람이 되어 멋진 사람들을 만난다. 나의 고귀함을 나의 방법으로 지켜낸다.
너희가 무심코 누르는 '좋아요', 그 안에 언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