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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 생각남 Dec 29. 2021

99999 무한만큼 더더 사랑해요

아빠, 편지지 고르세요.
내일 엄마 생일이잖아요. 편지 쓰세요


퇴근하고 집에 오니 아이들은 편지를 쓰고 있었다. 코트를 벗고 옷을 갈아입고 있는 내게 1호가 편지지를 드민다. 아빠도 엄마 생일 축하 편지를 쓰라고. 한 여자를 위해 편지를 쓰는 세 남자. 아빠 생일에는 잘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우리 집의 서열을 잘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편지를 다 쓴 아이들이 소파에 편지를 나란히 올려놨다. 편지 내용이 궁금해서 살짝 커닝을 했다. 쌍둥이지만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1호와 2호의 편지. 1호의 편지에 한 번 놀랐고, 2호의 편지에 한번 더 놀랐다.


# 상상력이 풍부한 1호의 편지


엄마가 할머니가 되면 저(제) 차에 타세요


1분 차이로 태어났지만 1호는 장남 티를 냈다. 1호는 2호에 비해 어른이 되면 아빠, 엄마를 돌보겠다는 말을 많이 하는 편이다. 지금은 엄마, 아빠가 운전하는 차에 자신들이 타고 있지만 어른이 되면 자기가 아빠, 엄마를 차로 모시겠다는 다짐이었다.


얼마 전에는 30kg이 가까운 자신을 팔베개 하느라 팔을 아파하는 아빠에게 비슷한 말을 한 적도 있었다.


아빠, 아빠가 할아버지가 되면
 뼈가 약해져서 팔베개해주기 어려울 거 거잖아요.
그럼 그때는 내가 아빠 팔베개 해줄게요


할머니가 된 엄마는 자기 차에 태워주고, 할아버지가 된 아빠는 자기가 팔베개해주겠다고 말하는 1호.


하늘만큼 바다만큼 우주만큼 더더 사랑해요


1호의 말에 한편으론 고맙고 다른 한편으론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졌다. ‘하늘만큼 우주만큼 사랑한다’는 말은 내가 종종 쌍둥이들에게 했던 말이었다. 어떻게든 아이들에게 사랑의 마음을 전달해서 자존감을 키워주려고 붙인 수식어였다. 아이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했던가. 아이들은 안 보는 척 다 보고 있었고 안 듣는 척 다 듣고 있었다.


99999 무한만큼 더더 사랑해요


초등 2학년으로 한창 숫자를 배우고 있는 1호. 1호에게 가장 큰 숫자는 ‘9’이다. 그 숫자를 여러 번 나열하는 것이 ‘큰’ 수가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셀 수 없을 만큼 큰 것이 ‘무한대’라는 것을 배워 강조의 강조의 강조를 한 것이다.


학교에 있으면 엄마하고 아빠하고
 맨날 계속 보고 싶어요


이 보다 더 설레는 사랑 고백이 있을까? 예정일보다 일찍 태어난 탓으로 두 달 동안 인큐베이터 신세를 졌던 1호. 태생적으로 사랑을 적게 준 원 죄(?)를 갖고 있어서 그런지 사랑을 바라는 1호의 말은 고마우면서도 가슴이 짠하다.


1호의 편지에 가슴이 먹먹할 때쯤 2호의 편지를 열어봤다. 또, 어떤 감동이 나올지 내심 기대가 됐다. 하지만 편지를 열어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논리적인 완벽주의자 2호의 편지


2호의 편지는 딱 4줄이었다. 편지지 한 장 가득 메운 1호의 편지와는 완전 다른 느낌이었다. 2호는 1호에 비해 꼼꼼하고 논리적인 것을 좋아하면서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이었다.


2호의 편지가 대충 쓴 것은 아니었다. 1호보다 더 고민하고 고민하고 시간을 더 들여 4줄을 완성한 것이었다. 편지를 쓸 때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빠, 찾아볼 게 있는데요.
 아빠 핸드폰 사용해도 돼요?


2호가 내 핸드폰으로 검색하여 쓴 단어는 ‘Congratulation’과 ‘I Love You’였다. 엄마에게 자신이 영어 단어를 사용했다는 자랑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민 고민 끝에 두 단어를 생각해냈고 아빠 핸드폰으로 단어의 철자를 확인해서 쓴 것이었다.


아이들의 편지를 읽는데 며칠 전 아이들의 수학 성적 결과가 떠올랐다.


쌍둥이들은 민간 학원에서 주최한 전국 단위 온라인 수학시험에 참가를 했다. 논리적이고 상대적으로 수리능력이 뛰어난 2호는 최우수상과 메달을 받았다. 대상, 최우수상, 우수상, 장려상 중에서 두 번째로 높은 등급의 상을 받은 것이었다. 상상력이 풍부하지만 상대적으로 수리능력이 부족했던 1호는 장려상을 받았다. 장려상을 누구나 받는 참가상 성격이었다. 장려상은 메달도 주지 않았다.


2호는 외할머니, 할머니께 전화를 걸어 자신의 수상 성적을 신이 난 목소리로 자랑했다. 1호는 그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1호에게도 ‘열심히 잘해줘서 고맙다’며 칭찬을 해줬지만 1호의 축 처진 어깨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2호는 1호보다 학업능력이 뛰어나다. 그래서 종종 시험에서 더 우수한 ‘점수’를 받아온다. 엄마의 생일 축하를 해주는 1호와 2호의 편지를 봤을 때 누구의 편지에 더 잘 썼다고 ‘점수’를 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각자 자신의 성격에 맞게 마음과 문장을 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와 아빠를 생각하는 자신의 마음을 세밀하게 1호 다운 문장들로 잘 표현해준 1호에게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엄마 생일 축하 편지는 평가할 수도 '수치화' 할 수도 없다. 아이들은 커가면서 수많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수치'로서 결과를 평가받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숫자로 나타낼 수 없는 중요한 것, 소중한 것들이 '99999 무한만큼 더더' 많다. 1호가 엄마에게 쓴 편지를 통해 그 중요한 진리를 쌍둥이들에게 꼭 알려주고 싶다.


돌아보면 아이들에게 편지를 종종 써줬었다. 아이들이 깨기 전 일찍 출근할 때면 색종이 뒤에 잘 다녀오겠다는 편지를 썼고, 생일이 되면 선물과 함께 축하 편지를 줬었다. 어쩌면 아이들이 엄마에게 편지를 써 줬던 것도 그런 모습이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아이들에게 다시 편지를 자주 써줘야겠다. 아이들과의 소통의 끈을 이어가기 위해서. 아이들이 사춘기에 들어섰을 때 직접 말로 전할 수 없는 마음을 몇 자 적어 보낼 수 있도록 마음을 전하는 ‘핫라인’을 지금부터 잘 구축해놔야겠다.


아들,
 99999 무한대만큼
더더'더'사랑해!
(아빠가 '더' 한번 더
붙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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