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어머니가 감자를 삶아주시면 나는 소금을 찍어 먹었다. 형은 꼭 설탕을 찾았다. 나도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어봤지만 아무래도 나는 소금이 좋았다.
‘설탕이 좋아? 소금이 좋아?’
이 질문은 어쩌면 ‘짜장면이 좋아? 짬뽕이 좋아?’, ‘양념이 좋아? 후라이드가 좋아?’라는 질문들보다 훨씬 역사가 깊은 양자택일류 질문의 조상쯤 되지 않을까 싶다.
연말을 맞아 쌍둥이들을 포함한 네 가족이 드라이브를 하던 중이었다. 게릴라성으로 내렸던 눈들이 그늘진 곳은 녹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 나무마다 눈들이 내려앉은 모습이 참으로 절경이었다. 아이들에게 그 멋진 모습을 설명하려다 보니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얘들아, 창 밖 나무 좀 봐봐. 나무 위에 누가 소금을 뿌려놓은 것 같아”
그 말은 들은 아내가 한 마디 했다.
“소금이 뭐야? 설탕도 아니고?”
설탕 vs 소금
나무 위에 얹어놓은 달달한 솜사탕이라... 아내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한편으로 못내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왜 나무 위의 소금이라고 하면 안 될까?’
예부터 집에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재수 없다. 소금 뿌려라’
소금은 나쁜 액운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소금’은 부정적인 이미지와 자연스레 연결이 돼 있다. 검은 것(?)들을 관리하다 보니 자신의 이미지조차 검어진 것이다.
‘빛과 소금’이라고 하면서 세상에 없어서 안될 소중한 것이라고 손가락을 치켜세우지만 설탕만큼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질 수 없는 숙명(?)을 소금은 타고났다.
공격수 vs 수비수
설탕이 공격수라면 소금은 수비수에 비유할 수 있다. 설탕으로 만든 사탕, 초콜릿, 케이크는 아이들에게 크게 환영을 받는다. 솜사탕은 낭만과 환상의 상징이기도 하다. 설탕이 주는 이미지는 달콤함이다. 생각만 해도 미소가 지어진다. 설탕은 액션 하나하나가 웃음 포인트를 올리는 '공격수'다.
반면 소금은 웃음과는 거리가 멀다. 소금을 한 꼬집 입에 물면 어떨까? 소금은 설탕만큼의 개인기도 없다. 소금으로만 만든 과자는 없다. 솜 소금을 먹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소금도경기에서 빠질 수 없이 중요한 수비수 역할은 한다. 득점을 올리는 게 중요하다고 모두 공격수가 될 수 있을까? 소금이 빠진 음식은 무조건 실점한다. 아무리 자연의 진미를 몽땅 모아 음식을 만들어도 소금이 없다면 실패한 음식이다. 소금은 그렇게 직접적인 득점을 하지는 않지만 음식이 실패하지 않도록 실점을 막아주는 든든한 수비수 역할을 한다.
설탕같은 삶 vs 소금같은 삶
설탕 같은 삶이 주연의 삶이라면 소금 같은 삶은 조연의 삶에 비유할 수도 있다.
설탕은 존재 자체로서 주인공이다. 언제나 자신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사탕은 사탕수수, 사탕무 등을 원료로 해서 만든다. 그리고 자신을 녹여 사탕, 솜사탕 등을 만든다. 원료부터 가공물까지 언제나 자신을 이름을 그대로 또는 변형해서 드러낸다. 반면 소금은 절대 대놓고 앞서지 않는다. 언제 조용히 음식의 간을 맞추는 역할을 할 뿐이다.
나에게 설탕 같은 삶과 소금 같은 삶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나는 ‘소금 같은 삶’을 선택하고 싶다. 학창 시절 축구를 하면 언제나 나는 수비수였다. 달리기가 빠르지도 않았고, 화려한 발재간도 없었고, 슛을 때리는 강력한 오른발, 왼발도 없었다. 내가 갖고 있는 건 '열정과 끈기' 정도였다. 상대방 공격수가 골 대 앞으로 달려올 때면 한 골 내주지 않기 위해서 죽어라 쫓아가서 공을 뺏는 열정과 공격수를 놓쳤을 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따라붙는 끈기.
어쩌면 '소금 같은 삶'은 내 선택이라기보다 내가 가진 재능을 생각했을 때 어쩔 수 없는 나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나무 위에 내린 하얀 것들을 보며 못내 '소금의 비유'가 아쉬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문득 '메밀꽃 필 무렵'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달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 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 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