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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 생각남 Oct 13. 2024

노벨문학상을 넘어, 한강이 전하는 4가지 이야기

한강의 물결, 노벨문학상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다

"한강을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중·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삼국시대의 나라별 전성기를 설명하며 선생님께서 해주셨던 말씀입니다.     

백제의 근초고왕 4세기,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5세기, 신라의 진흥왕 6세기. 삼국이 가장 융성했던 시기마다 그들은 '한강'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다시 '한강의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이번엔 문학입니다. 서점가에서는 한강 작가의 작품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습니다. 국내 최초, 여성으로 아시아 최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책들은 이제 없어서 못 팔 지경입니다. 독서와 글쓰기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2024 '한강의 시대'를 네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역주행 : 한강의 역류     


"책 안 보던 남편마저…"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한강 작가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매진 행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사전 예약을 걸어야 겨우 구매할 수 있습니다. 언론들은 앞다투어 '매진' 소식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심지어 출판 관련 주식마저 급등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역주행 열풍은 걸그룹 브레이브 걸스의 ‘롤린’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들은 한때 무명이었지만, 군부대에서의 위문 공연 영상이 유튜브에서 화제가 되며 '역주행'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여느 걸그룹이라면 꺼릴 법한 산골 군부대까지 찾아가 정성을 다해 위문 공연을 했던 '롤린'의 선행 영상들이 재조명되었고, 예비역 남성들로부터 뜨거운 감사의 박수를 받았습니다.      


노벨문학상은 '거대한 조명'과 같습니다. 수상으로 한강 작가의 작품 가치가 더 높아진 것은 아닙니다. 이미 노벨상 이전에도 그녀는 꾸준히 자신만의 세계관을 담은 작품들을 발표해 왔습니다. 노벨문학상은 단지 그 가치를 알아보고, 전 세계 사람들이 그 작품들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조명을 비춘 것입니다.    

 

한강 작가와 브레이브걸스의 역주행 사례는 '서사의 축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만약, 한강 작가가 첫 작품이 수상하지 못했다고 좌절하여 글쓰기를 중단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혹은 무명 시절의 브레이브걸스가 자신들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것에 실망해 팀을 해체했다면 어땠을까요? (실제로 브레이브걸스는 역주행 직전에 해체 위기에 있었습니다.)     


한강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소설을 쓴다는 건 독자적인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전공이나 도제과정 없이도 쓰려는 의지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소설가"라고 설명했으며, 동시에 그것은 "고독한 일"이라고도 했습니다. 이 말은 소설뿐만 아니라 글쓰기, 영상 제작 등 창작 활동 전반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한강 작가의 인터뷰를 통해 1인 크리에이터의 길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2 이야기의 힘 : 이야기는 세상을 움직인다     


'배틀' 형식의 예능은 오랫동안 방송가에서 자주 사용된, 다소 진부한 포맷입니다. 그런데 최근 한 OTT 플랫폼에서 이 고전적인 '요리 배틀' 형식을 참신하게 기획한 예능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바로 '흑백요리사'입니다. '흑백요리사'가 성공한 비결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 답을 '이야기의 힘'에서 찾습니다. 학창 시절 배웠던 구성의 3요소, 즉 '인물, 배경, 사건'은 이야기의 기본 요소로 치환될 수 있습니다. 이야기에는 주인공과 빌런이라는 인물, 그들이 처한 배경,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대결이라는 사건이 있습니다. '흑백 요리사'는 이 기본 구조를 흥미롭게 활용했습니다. 유명 요리사에게는 흰 가운, 무명 요리사에게는 검은 가운을 입혔고, 대한민국의 대표 셰프인 백종원과 빌런 같은 캐릭터의 안성재 셰프를 평가자로 내세워 대결의 긴장감을 더했습니다. 백종원의 구수한 평가와 안성재 셰프의 날카로운 평가가 흑과 백의 대결 구도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한강 작가의 작품들은 주로 '폭력'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룹니다. '소년이 온다'는 1980년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을, '작별하지 않는다'는 1947년 제주 4.3 사건을 다루며, 두 작품 모두 '국가 폭력'을 이야기합니다. '채식주의자'는 가정 내 폭력을 다루며, 육식을 거부하는 한 여성이 가족에게서 얼마나 폭력적으로 억압받는지를 묘사합니다. 이러한 주제들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풀어냈다면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졌을 수 있지만, 한강 작가는 이를 '이야기'라는 틀에 담아 독자들이 더 쉽게 다가가도록 했습니다. 무거운 주제가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죠. 이 점에서 다시 한번 '이야기의 힘'을 실감하게 됩니다.     


#3 읽기와 쓰기 : 다시 읽기, 다시 쓰기     


챗GPT 같은 생성형 AI 시대에는 읽기와 쓰기마저 '외주화'가 가능합니다. '요약해 줘'라고 입력하면 방대한 양의 글을 몇 줄로 간단히 요약해 주고, '(대신) 작성해 줘'라고 하면 조건에 맞춰 글도 대신 써줍니다.  이런 식으로 읽기와 쓰기의 외주화가 지속된다면, 사람은 점차 그 능력을 잃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자율주행 자동차가 보편화되면 운전할 필요가 없어지고, 결국 운전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점점 잠들어가던 '읽기'와 '쓰기'의 본능을 깨우는 ‘강력한 알람’ 같습니다.(wake up, wake up) 사람들은 한강 작가의 소설을 찾기 시작했고, 다른 작가의 책에도 관심을 가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많이 읽다 보면 자연스레 쓰고 싶은 마음도 들기 마련이죠. (저 역시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에 뭐라도 적고 싶은 충동에 주저리주저리 쓰고 있는 것처럼요.)     


AI가 읽기와 쓰기를 대신하는 시대에 진정한 경쟁력은 스스로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을 갖추고 AI를 활용하는 사람과, AI가 제공하는 답에만 의존하는 사람 사이에서 갈리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4 전달자 : 그림자 작가, 번역가     


마지막으로, 한강 작가의 작품이 세계적인 찬사를 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번역가들의 공로가 큽니다. 봉준호 감독이 말했듯이, "1cm의 언어 장벽"을 넘었기에 한강 작가의 작품이 한강을 넘어 대서양과 태평양까지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번역가의 역할은 단순히 언어를 변환하는 것을 넘어, 작품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그림자 작가'와도 같습니다. 결국, 기획자나 작가가 아무리 훌륭한 작품을 만들었다 해도, 그것을 어떻게 포장하고 전달하느냐가 그 작품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창작 이후, 작가를 비롯한 모든 크리에이터들이 고민해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좋은 이야기’는 ‘좋은 꺼리’가 됩니다. 개인적으로 이야기 꺼리, 상업적으로 마케팅 꺼리(소재), 제2차 콘텐츠 꺼리(원천) 그리고 사회적으로 사회의 활력을 주는 메시지가 됩니다.     


2024년이 얼마 남지 않은 10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2024년 최고의 ‘이야기 꺼리(소재)’가 됐습니다. 한강 작가님 작품의 주요 문장을 몇 가지 공유드리며 글을 마칩니다.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 '채식주의자'(2007년, 창비)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 '소년이 온다'(2014년, 창비)     


"나는 외로움이 좋았다. 외로움은 내 집이었고 옷이었고 밥이었다. 어떤 종류의 영혼은 외로움이 완성시켜 준 것이어서, 그것이 빠져나가면 한꺼번에 허물어지고 만다"

  - '검은 사슴'(1998년,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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