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왜 그런 것까지 닮니?(1)

글씨 쓸 때마다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

by 오늘도 생각남
건이는 벌써 끝났잖아요.
나는 왜 이렇게 오래 걸려요?


국어 숙제를 하던 준이(8살)가 또 울음을 터뜨렸다. 글씨 따라 쓰기를 할 때마다 반복되는 광경이다. 쌍둥이 형 건이(8살)는 글씨 따라 쓰기 숙제가 일찍 끝난다. 고민 없이 쓱쓱 하면 끝이다. 꼼꼼한 성격의 원칙주의자 준이는 시간이 배로 걸린다. 글씨를 쓰다가 선을 벗어날 때마다 지우개를 찾는다. 한 글자를 쓰면서도 썼다 지웠다를 수없이 반복한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큰 고구마 하나가 가슴에 걸려있는 듯하다. 연필은 왜 그렇게 꾹 잡고 쓰는지 연필심이 안 부러지는 게 신기할 정도다. 건이의 글쓰기가 틀려도 상관없는 선 긋기라면, 준이의 글쓰기는 틀 안에서 삐져나오면 안 되는 색칠하기다.

선 긋기(왼쪽, 건이) vs 꼼꼼하게 색칠하기(오른쪽, 준이)

한 글자 쓰는 것에도 지우개를 수없이 찾으며 끙끙대는 준이의 모습에서 고지식함의 덩어리였던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나는 미술시간이 제일 싫었다. 친구들은 신나서 그림도 그리고 색칠도 했지만 나는 그 시간이 너무 힘들었다. 나는 '사실주의 화가' 같았다.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똑같이 그려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똑같이 그려야 하는데 그렇게 그릴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림 한 획을 시작하기가 어려웠다. 색칠할 때도 현실 세상의 색깔과 똑같은 색깔을 찾으려고 했다. 사람 얼굴은 살색을 칠해야 하는데 크레파스에 살 색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친구들은 얼굴에 녹색도 칠하고 파란색도 칠했다. '저렇게 칠해도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쉽사리 따라 하지 못했다. '근데 살색은 어떻게 구하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조금 틀리게 그려도 돼', '현실과 다르게 그려도 상관없어'라는 말은 내 머릿속에 입력돼 있지 않았다. 나는 곧 죽어도 똑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글씨 따라 쓰기를 하면서 선을 벗어나면 큰 일이라도 생길까 걱정하는 누구처럼.


내 고지식한 성격은 체육시간에도 빛을 발했다. 운동회 종목이었던 줄넘기 달리기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줄넘기 한 바퀴에 한 발을 뛰라고 말씀하셨다. 줄 한 바퀴 돌리고 왼 발, 또 한 바퀴 돌리고 오른발. 운동회날 당일, 줄넘기 달리기가 시작되었다. 친구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빨리 뛰려면 줄 한 바퀴 돌리고 여러 발을 가야 한다는 사실을. 친구들은 한 바퀴에 양발을 뛰는 건 기본이고 더 요령을 부리는 친구는 줄 한 바퀴에 대 여섯 발을 뛰었다. 착실하게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나는 '줄넘기 한 바퀴에 왼발, 줄넘기 한 바퀴에 오른발' 규칙을 엄수해서 달렸다. 다른 친구들보다 더 열심히 줄넘기를 돌렸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은 달리기를 하며 줄을 넘고 있었고 나는 줄넘기를 하며 앞으로 이동하는 묘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선생님 말씀을 유일하게 지킨 나는 꼴찌를 했다. 결승선에 도착해서 규칙을 지키지 않은 아이들에게 페널티가 있지 않을까 순진한 기대를 했지만 선생님은 선두로 결승선에 도착한 친구들을 칭찬하고 계셨다.

어른이 된 후에도 고지식함이 내 발목을 잡는 경우들이 있다.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 보면 가끔 밤을 새운다. 자발적 밤샘. 형식적인 일 처리를 싫어하는 나는 '모든' 보고서를 작성하기 전에 이 일을 왜 하는지 목적을 생각하고 성과를 생각해본다. 그리고 관련 현황들을 찾아본다. 충분히 전체 그림이 이해된 뒤에 보고서 작성을 시작한다. 보고서의 구조가 논리에 맞지 않으면 또 한참을 끙끙대며 씨름을 한다. 그러다 보면 날이 샌다.


사무실에서 일을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선택과 집중'을 잘한다. 중요한 일에 집중해서 힘을 쏟을 줄 알고 덜 중요한 일에는 힘을 뺄 줄 안다. 그들은 한정된 에너지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감각적으로 잘 알고 있다. 줄넘기 달리기의 요령은 줄 한 바퀴에 여러 발을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모든 일을' 원칙적으로 성실하게 처리하려는 나와는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개인 자유시간의 차이를 만들어 내고 개인이 받는 스트레스의 양을 결정한다.


한 글자 한 글자 쭉쭉 나아가지 못하고 낑낑대는 아들을 보며 '줄 한 바퀴에 왼발, 줄 한 바퀴에 오른발'의 소신을 지키던 어린 시절의 나를 본다.


'준아, 많이 힘들지? 누가 그러더라. 살면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힘 빼기의 기술'이라고. 글씨를 쓸 때도 너무 힘들여서 연필을 잡으면 손가락이 아프잖아. 너무 힘줘서 쓰다 보면 종이가 찢어질 수도 있고, 연필심이 부러질 수도 있고. 모든 일에는 그에 맞는 적당량의 힘이 있는 것 같아. 어떤 사람들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잘 알거든. 근데 아빠는 잘 모르겠더라. 그래서 마흔이 넘은 지금도 '힘 빼는 기술'을 연마하는 중이야. 조금 틀리더라도 조금 부족하더라도 그냥 넘어가는 요령을. 조금 틀렸다고 큰일이 발생하지는 않거든. 아들, 이것 하나 기억해줘. 힘을 잘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힘을 잘 빼는 것도 실력이야. 강약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고수야. 진정한 고수가 되면 뭐가 좋냐고? 응, 삶이 편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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