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결의 반칙- 첫번째 반칙
1) 조직에서 일어나는 반칙들
많은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이 사회에서 어떤 의사 결정을 할 때 우리는 보통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다수의 결정에 따라왔다. 물론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에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한 다수결이 그나마 합리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정책이나 제도도 완벽한 것은 없듯 다수결의 원칙도 많은 부작용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의사결정에 있어서 다수결의 원칙이 가진 부작용은 차치하더라도 다수의 힘에 의한 소수를 짓누르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데 필자는 이를 '다수결의 반칙'이라고 얘기하고 싶다.
한국 사회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기수 체계'이다. 우리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기수'를 가진다. '어느 학교 몇 회 졸업생', '어느 대학교 몇 학번', '공채 몇 기' 등. 이렇게 우린 어떤 조직에 들어간 순서 또는 조직을 나온 순서를 숫자로 매김으로써 같은 조직 출신이라는 소속감을 다짐과 동시에 서열이 자동적으로 정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수 체계는 그 기수에 들어가지 못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어중이떠중이 격으로 만들게 되고 같은 학교, 같은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소외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먼저 내가 대학 생활을 하며 느낀 점은 편입생, 전과생들의 소외감이다. 다행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난 신입생으로 입학하여 정식(?) 학번을 부여받은 다수에 속했다. '몇 학번 누구입니다!'라고 나를 소개하면 그만이었고 나 역시 선배들을 학번으로 기억했다. 내가 선배가 되었을 땐 마찬가지로 후배들을 학번으로 기억했다. 그런데 이 소개가 길어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난 원래 몇 학번인데 편입을 해서 학번이 좀 달라." 또는 "난 입학할 땐 몇 학번 무슨 과였는데 전과했어."
이렇게 소개가 길어지는 이유는 자신의 학번을 명확하게 소개하기 어려워서가 아닐까.
난 대학 생활을 하며 이렇게 편입이나 전과한 사람들이 학과 생활에 적극적이거나 적응을 엄청 잘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그리고 신입생으로 입학하지 않은, 소위 성골이 아닌 이 소수의 사람들을 같은 학과 사람들로 인정하지 않는 보이지 않는 소외가 있었던 것 같다.
졸업 후 동문회에 가 보아도 소수였던 그 사람들이 동문회에 참여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물론 학교마다, 학과마다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이런 분위기가 대다수라고 생각한다. 이런 분위기는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회사에는 공채와 사채(필자는 경력직 및 수시 채용자를 사채로 명명함)가 있고 군조직에는 육사와 육사가 아닌 자가 있고 경찰 조직에는 경찰대 출신과 아닌 자가 있다. 또 난 다행히(?) 회사를 공채로 입사해 동기가 있었고 기수를 부여받았으며 회사 선배들이 '몇 기냐?'라고 물으면 '몇 기입니다.'라고 대답하면 그만이었다.
공채들끼리의 모임에도 낄 수가 있었고 무엇보다 함께 입사해 교육을 받은 동기들이 있어 신입사원 생활에 큰 힘이 되었다. 그렇게 회사의 짬밥을 먹어가던 어느 날, 처음 보는 분이 사무실에 있어 선배에게 물었다.
"저분 누구세요?"
"아, 경력직으로 새로 왔어."
"그럼 저보다 선배이신가요?"
"연차로 치면 그럴 건데 뭐, 신경 쓰지 마. 서로 존대하면 돼."
누군가 회사에 새로 왔음에도 다들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고 인사도 시켜주지 않았다. 이 역시 회사마다 분위기가 다르고 요즘은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기수 체계가 강한 조직은 다수의 사조직이 소수를 소외시키는 건 여전하다. 직장 내 괴롭힘의 대부분이 이런 다수가 소수를 소외시키는 게 기본으로 깔려있기도 하니까.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이직을 하게 되어 경력직으로 입사를 하게 되었다. 오랜 시간 '공채'라는 다수의 입장에서 '사채'로 전환되는 순간, 첫 출근부터 엄청난 부담과 긴장을 느꼈다. 분명 이 회사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공채일 것이고 역시나 기수가 있다. 하지만 난 이제 뭐라고 날 소개해야 하는가?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부담감이었다. 그리고 결국 내 소개가 길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저는 어떤 회사에서 이직한 경력직인데 연차는 몇 년을 받아 지금 몇 연차입니다."
예전엔 '공채 몇 기입니다.'라고 끝낼 수 있었던 내 소개가 구구절절 길어짐을 느끼며 나중엔 마치 대학생처럼 신입사원 입사연도를 말하는 게 오히려 편할 정도였다.
군조직은 육사 출신이냐, 34관 출신이냐, ROTC 출신이냐 등등을 따지고 경찰 조직은 경찰대 출신이냐, 경간부 출신이냐 등등을 따진다. 그리고 법조계 역시 지금은 사라졌지만 예전의 '사법고시 몇 회'를 여전히 따지고 있다. 더불어 체육계가 가진 고질적 문제 중 하나가 특정 학교 출신이 '다수결의 반칙'을 범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그 안에 '몇 기'라는 기수 체계가 덧붙어있고 그들끼리의 다수를 만들어 조직에서의 영향력을 키워 소수를 무시하기도 한다.
이 조직에 몸담은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조직을 꽉 잡고 있는 다수에 의한 다수결의 반칙은 수도 없이 많이 일어난다고 했다. 사법고시가 사라진 지금도 사시 출신들은 로스쿨 출신에 대한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난 이런 '다수결의 반칙'을 겪고 사는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로 담아보고 싶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나 역시 다수의 공채에서 소수의 사채가 되었던 것처럼 우리는 언제나 다수에 속할 수 없다. 지금은 뒷 배가 든든한 다수였지만 당장 내일 소수가 될 수도 있다. 누구나 소수가 될 수 있기에 이런 '다수결의 반칙'을 범하지 말자고 얘기하고 싶어 소설에 녹여냈다.
소설 속 주인공 창화는 곧 우리이고 우리가 한 번쯤 겪어 본 소수의 소외감을 가진 인물이다. 난 창화라는 인물을 통해 조직에서 '다수결의 반칙'에 의해 희생당할 수밖에 없는 소수의 아픔을 전달하려고 애썼다.
인생은 길고 우린 어쩌면 평생을 조직에 속해 사회생활을 한다. 같은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끼리 뭉쳐 서로 도와주고 끌어주는 건 어쩌면 우리가 가진 '기수 체계'의 장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장점이 왜곡되고 과장되면서 '다수결의 반칙'을 소수에게 범하지 않길 바라는 입장이다.
나와 출신이 같지 않다는 이유로 같은 팀이라는 것 자체를 부정한다면 그 팀은 결국 부패한다. '다수결의 반칙'을 범하는 사람들을 견제하고 비판할 수 있는 소수가 없다면 결국 그 조직은 썩어가기 마련이다. 비록 나와 걸어온 길이 다르더라도, 나와 시작점이 달랐더라도 지금 같은 곳에 도착해 함께 서 있다는 것이 더욱 중요한 사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