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방법

사유와 기록

by 오서

우리를 놀라게 했던 알파고의 등장 이후 전 세계는 AI 광풍이 불어대며 너도나도 AI를 외치기 시작했고, 챗 GPT의 등장은 사람들을 AI 블랙홀 속으로 강력하게 빨아들였다.

하지만 AI의 발전이 결코 기쁘게 다가오지 만은 않는다. AI가 내 일자리를 빼앗을까 두렵다는 걱정은 공포가 되었고, AI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AI 개발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만연해지며 인문학은 돈도 안 되는 쓸데없는 학문으로 전락하고 있다. AI 시대, 인문학은 진정 쓸데없는 학문인가?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은 쓸모없다고 느끼는 이유는 인문학이 공기와 같기 때문이다.



공기같은 인문학

미세먼지 농도가 높아져도 우린 그저 '오늘 공기 안 좋네.'라고 투덜거릴 뿐이다. 미세먼지 농도 좀 높아진 걸로 지구 대기를 깨끗하게 만들어야 한다며 환경 운동가가 되거나 매일 몰고 다니던 자동차를 파는 사람은 없다. 조금 불편하지만 숨 쉬는 데 문제가 없고 내 일상에 지장이 없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넘기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얼마 전 중국 내몽고 지역을 주황색으로 칠갑한 황사가 매일같이 이어지고 외출할 때마다 방독면을 써야 해 일상에 불편함이 초래된다면, 그제야 깨끗한 공기의 필요성을 느끼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려 안간힘을 쓰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인문학은 공기와 같다. 불편해져야 비로소 필요성을 느끼고 필요성을 느낄 때는 이미 늦어버리는 것. 그게 바로 인문학이다.



인간만의 특권- 사유와 기록

인문학은 인간이 오랜 시간에 걸쳐 켜켜이 쌓아 온 매우 귀중하고 고귀한 산물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연구하고 공부하며 인간다움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존재한 것이 인문학이다. 그런 인문학을 놓겠다는 건 인간다움을 놓겠다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 중 하나가 바로 '사유'하는 것과 그것을 '기록'하는 것이다. 사유와 기록이 가능하기에 인간에게는 역사가 된 과거가 있고, 꿈같은 미래도 존재할 수 있다. 동물에게 과연 과거와 미래가 있을까? 동물은 철저히 현재에 산다. 지금 당장 배불리 먹고 잘 자고 잘 싸면 그만인 것이 동물이다. 동물에게는 돌아볼 역사가 없고 앞으로의 꿈도 없다. 영화 아저씨의 대사 '난 오늘만 산다.'는 모든 것을 잃어 미래에 대한 기대도 목표도 없어져 산 송장 같은 삶을 사는 인간이 얼마나 처참한 것인지 느끼게 해 준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생각도 하기 싫어하고 글도 쓰기 싫어한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사유와 기록'을 하기 싫다는 것은 인간다움을 포기하겠다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깊게 생각하지 않고 막말을 뱉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이상 행동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예전에는 없던 잔인하고 무작위 적인 범죄가 늘어나고 블랙박스 예능 프로그램만 봐도 이상 행동을 하는 사람이 도처에 널려있다. 언제 어디서 누가 갑자기 나에게 흉기를 들고 달려들지 모르는 지금이 동물의 왕국이자 아프리카 초원과 다를 게 뭐가 있을까? 인간이 인간다움을 포기한 대가는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이다.



인간다움을 포기하는 인간

아주 오랜 시간 쌓아 온 인문학이 무너지고 있다. 쌓는 것은 여러 사람의 노력과 긴 시간이 필요하지만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인문학을 다시 살려야겠다고 느끼기 시작할 때는 이미 늦다는 것이다. 인문학은 개발하고자 하면 뚝딱 나오는 AI와는 다르다. 무너진 인문학을 다시 쌓아 올리려면 또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실, 지구 온난화를 막을 수 있는 골든타임이 지나고 있는 것처럼 인문학 붕괴의 골든타임도 지나고 있다.

챗 GPT와 같은 생성형 AI 개발 기업들은 그것의 편의성만 강조하고 있다. 마치 모든 업무에 생성형 AI가 주가 될 것이기 때문에 생성형 AI를 학습하고 따라가야 하는 것처럼 분위기를 유도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생성형 AI는 사주와 결이 비슷하다. 사주가 많은 사람들의 경우의 수와 확률에 의거해 내려지는 결론인 것처럼, 생성형 AI 역시 많은 데이터를 수집해 정리를 해서 결론을 도출한다. 사주가 아무리 잘 맞다 해도 우리 삶의 주가 될 수 없고 언제까지나 참고 사항이듯 생성형 AI 역시 보조적 수단에 불과하다. 이런 보조적 수단을 마치 주요 수단처럼 사용하고 의지한다면 결국 '사유와 기록'을 포기하게 되고 나아가 인간다움마저 잃게 될 것이다.



마치며

생각해 보라. 생성형 AI에 인간의 창의력이 입력되지 않고, 모두가 AI가 생성해 주는 내용만 계속 반복해서 쓰게 되면서 AI 역시 그 반복 사용된 데이터만 수집한다면 생성형 AI가 내놓는 답의 퀄리티는 점점 어떻게 될까?

시간이 지날수록, 사용자가 많아질수록, 생성형 AI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답변의 퀄리티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창의형' AI가 아니라 언제까지나 '생성형' AI인 것이다. 이런 보조적 수단을 마치 주요 수단인 것처럼 사용하게 되어 '사유와 기록'을 스스로 포기하는 바보 같은 선택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내가 AI의 혜택을 받지 않고 사는 것은 아니다. 이 글에 있는 이미지도 모두 챗 GPT가 만들어 준 것이고 나 역시 필요할 때는 활용한다. 내 요지는 AI 분야가 잘못 됐다는 것이 아니라 AI 분야에만 집중하다가 인문학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말자는 것이다.

인문학은 인간다움을 발휘하는 학문이고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와주며 인간만이 공감할 수 있는 길이다. 인터넷이 생겼고 AI와 로봇까지 나오는 눈부신 기술의 발전만큼 우리의 행복은 발전하지 않는 이유를 상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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