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ine, I'm aging
인간은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존재라고 누가 그랬더라?
기가 막힌 명언이로다.
12월 14일 토요일 오후 2시. 어김없이 여의도 국회 앞으로.
지난주에 표결 보는데 다리도 아프고 추웠기 때문에, 미리 주문한 간이의자도 챙기고 롱패딩도 단디 챙겨 입고 나왔다. 먼저 신촌에서 돈가스로 든든하게 배를 채운 나는 9호선을 타보기로 했다.
아뿔싸, 아직 1시간도 더 남았는데 당산역에 사람이 이렇게 많다고? 지하철 안은 조용했지만, 암묵적으로 모두가 같은 바람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 같아 두근거렸다.
국회의사당역에서 질서 있게 내리는 사람들. 팻말을 든 사람들이 보였고, 유난히 20대 여성들을 많이 본 것 같다. 내리쬐는 햇살에 비친 얼굴들이 어찌 그리 당당하고 맑고 환해 보이던지.
역 앞에서 팻말을 챙기고, 촛불 대신 차량 유도봉을 들고 자리를 찾아 나섰다. 국회대로 앞은 이미 사람들이 가득 차서 지난번처럼 여유 있게 앉을 곳이 없었다. 사람들은 하나의 염원을 간직한 채 자리를 찾아 흘러갔다. 나도 물살에 떠맡기듯 서강대로 쪽으로 흘러가다가, 한 카페를 발견하고 한잔하고 가기로.
그 카페에 유난히 눈길이 갔던 이유는 출발 직전에 봤던 기사 때문이었다.
계엄군의 딸이지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커피 1,000잔을 선결제한 분에 대한 기사였다. 30대 중반을 달리는 나. 요즘 기사를 보면서 자꾸 눈에서 땀이 난다. 세월이 나를 이리 감성적으로 만든 걸까. 세상 참 살아갈만하구나, 오늘 더 열심히 외치자! 계기를 만들었던 기사였는데, 마침 그 카페를 마주한 것.
줄 서서 커피를 기다리는데, MissyUSA라는 곳에서 따수운 어묵을 제공하는 트럭도 발견했다.
보기만 해도 따뜻해지는 이 마음들을 어찌해야 할꼬. 엊그젠가 사랑에 대한 글을 읽다가, 진정한 사랑이란 자신을 확장시키는 것이라는 문구를 봤다. 집회에서 많은 이들이 보여주는 사랑의 형태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더 이상의 성장과 성숙이 있을까-를 의심하는 나를 확장시켜 주는 기분이었다.
아, 나는 잠시 잊고 있었구나. 삶은 결국 나와 타인과의 조화로써 아름답게 꾸려가는 것이라는 걸.
눈 옆에 자꾸 땀이 고였다.
따숩게 커피도 한잔했겠다, ㅁㅁ 정당 부스 옆 가로수 쪽에 서서 외치고, 노래하며, 탄핵소추안 표결을 지켜봤다. 결과는? 찬성 204표로 탄핵소추안은 가결됐다. 모두가 환호하고 소리쳤다. 환호하며 뒤를 돌았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함께 환호하는 군대 후임을 만났다. 인연이라는 게 정말 신기하구나.
배우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였는데, 이전부터 힘께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던 걸로 기억한다.
이 즐거운 순간을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할 친구가 바로 등 뒤에 있었다는 게 참 고마웠다.
풍선이 하늘 높이 떠다녔다. 모두의 켜켜묵은 갈증이 해갈되듯 자유롭게. 둥실둥실.
이어서 가결을 축하하는 노래와 함께 응원봉을 든 모두의 축제가 시작됐다.
집회의 MVP가 누구였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20대 여성이라고 말할 것이다.
정권 퇴진이나 사회적 이슈를 던지는 집회를 여러 번 참여해 봤지만, 늘 엄숙한 분위기였고 가끔은 대중들과 동떨어진 집회 문화가 오히려 참여를 저조시키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 적 있다.
그런데! 집회의 문화가 바뀌었다. 역시 젊음은 현명하다.
응원봉 하나에 보통 6~7만 원 정도 한다고 하는데, 그 소중한 응원봉을 가지고 나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불을 밝히는 이 마음을 보시라. 다양한 세대가 한 마음으로 섞여 즐거운 집회 문화를 만드는 데 기여한 이들에게 수백 번이고 박수를 치고 싶다.
다시 말하지만, 젊음은 현명하다. 세월로 무르익은 지혜를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뜨거운 젊음으로부터 표출되는 사랑을 배우고자 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왜냐면 누구나 한 때 그 가득한 사랑으로 삶을 살며 삶의 궤적을 바꾼 적 있을 테니. 결국 우리가 가진 가능성을 현실로 이끌어 내는 건, 그 사랑이었음을 알기에.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흘러나왔다. 떼창.가사 하나 놓치지 않고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이날 한 마음으로 원하는 그 세계, 그 마음을 결코 잊지 않기로 했다.
이제는 헌법재판소의 시간이다.
아직 작은 고비만을 넘겼지만 그래도,
환하고 따수운 그 얼굴들을 기억하며,
우리 모두 '다,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