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도 잘라낼 수 있다면

어느 날의 조각들

by 경계

어둠이 더위를 밀쳐내며 내렸다

바람은 길을 잃은 아이처럼 울었다


바람이 훑고 간 자리에

단단히 뿌리내린 것들이 흔들렸다

흔들릴 줄 알아야 꺾이지 않는다고

하염없이 저를 지켜보는 사람을 위로한다


너의 생은 나의 뿌리와 같아서

스스로 뽑아낼 수 없다고

그저 흔들리며 살아가자고


저기 연인과 통화하는 이에게

저기 주인이 걱정되어 밤새 짖는 강아지에게

마침내

날카로운 삶을 속으로 삼키는

나에게


말을 건넨다


07/06/2020


매일 아침 새로 뜨는 해가

설레는 삶일 줄 알았다


여명을 붙잡고

눈물로 떠나는 등에다 소리치며

더 이상의 내일은 싫다고

소리치며

매 순간 눈을 앙다물고


그렇게 20대가 지났다

돌아보면

멀찍이 돌아보면 눈물이었다

수평선 너머로 뻗어있는

일렁이는 바다였다


그저 멀리서

지나온 시간 그 파편 위로

부서져 빛나는 햇빛을 보며

그래도 찬란하지 않았나

저렇게 아름답지 않았나


밝은 태양 아래서 이토록 눈부신 삶이 아니었나

아득해지는 것이다

보고 있는 것은 얕은 수면일 뿐임을 알면서


의식적으로

외면하고 그래도 좋은 삶이었다고


웃는 것이다

우는 얼굴로

웃는 것이다


06/16/2020


어쩌면 산다는 것은

희로애락의 감정 수많은 감정

서럽게 웃고 찬란히 울던 순간들을 모아서

머릿속에 기록하며 그래

말없이 써 내려가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읽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남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언제나 사라지고 싶었다

사라지는 게 두려운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한 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싶다


타인의 삶이 희로애락으로 그 모습을 갖춰나가는 걸 보며

부러워도 가슴 아프게 부러워도 나는 한 줄이라도 덜 쓰려고 애쓰며

희로애락 가운데에서 그렇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채로

궁금한 것에 대한 질문을 멈추고 그렇게

삶도 멈추길 멈춤보다 더 멈추어

시작도 전으로 거슬러 모든 소중한 것을 내려놓고


애초에 빈 종이였다


06/13/2020


감정도 그저 장기라면 얼마나 좋을까. 뱃속에 자리 잡은 채라서, 상처를 드러내고, 고치고, 꿰매어 다시 제자리에 넣으면 다시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더 이상 아프지 않은, 흉터가 남는다 해도 건드리는 정도로는 결코 다시 물러 터지지 않는, 어쩌면 맹장처럼, 잘라내어도 살아가는데 문제없는, 장기라면 얼마나 좋을까


04/26/2020


감정이란 목 뒤로 넘긴다고 삼켜지는 법이 없고,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바래지는 종류의 것도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참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어 그대로 품고 있던 분노에 나는 조금씩 통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처음엔 단순히 지친 거라 생각했지만 피로라면 풀려야 했다. 무기력이 걷힐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것은 분명 피로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연필이 망가진 걸 의심조차 못한 채, 멀쩡한 연필깎이에서 문제를 찾아내어 고치려다가 되려 망가트릴 뻔했다. 몇 분의 분투는 내 인생과 닮아있었다. 그래서 또 웃었다. 심연의 가장 어둡고 불편한 곳을 이제 그만 바라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되려 똑바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심연의 굴레.


다른 감정으로 분노를 덮는 것은 불가능했다. 웃음으로 덮어도, 영원히 웃을 수 없는 법이고, 울음으로 덮어 도, 눈물은 그치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억지로 밀려난 분노들은 비슷한 결의 분노를 서로 끌어당겨 힘을 얻기라도 한 듯, 쓰나미가 되어 온 마음을 폐허로 만들곤 했다. 이젠 그만 아프고 싶다.


09/05/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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