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희망, 상했다.

판도라 설화의 재해석

by 경계

상자를 열어도 여전히 의문이다. 인류에게 불을 제공하고 신들의 미움을 샀던 프로메테우스를 기억하는가.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판도라라는 아름다운 여자를 만들어 신부로 선물한다. 그리고는 둘의 결혼을 축하하며 판도라에게 상자 하나를 주며, 절대 열어보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에 호기심이 생긴 판도라가 결국에는 상자를 열었다. 그로 인해 상자 안에 들어있던 나쁜 것들이 세상에 퍼져나갔다. 놀란 판도라가 상자를 황급히 닫아 버렸고 상자의 밑바닥에 희망이 남겨지게 된다. 그로 인해 우리는 불행 속에서도 희망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나.

Pandora,_by_Walter_Crane.jpg Pandora, Walter Crane (출처: Wikimedia)

나와 제우스 둘 중 하나는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그러지 않고선 희망을 설명할 수가 없다. 인류를 벌하기 위한 상자 안에 희망이 있다니. 인류를 가엾게 여긴 다른 신이 그러한 계획을 알고 몰래 상자의 밑바닥에 희망을 넣어두었다는 편이 말이 된다. 제우스가 희망이라는 변덕을 부렸거나 내가 그마저도 베풀지 못하거나. 어느 쪽이 든 제우스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상자를 인간 그 자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상자는 누군가 알아채기 전부터 이미 거기에 있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이 그러하듯이. 그리고 제우스는 상자 안에 뭐가 들었는지 정확히 몰랐을 거다. 그래도 여전히 희망이 문제다. 희망은 대체 왜 남겨져야 했는지. 희망이 없는 세상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침내 니체가 답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인은 희망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에서도 우리와 달랐다. 그들은 희망을 맹목적이고 악성적인 것으로 느꼈다. 헤시 오도스는 우화 하나를 통해 이러한 태도를 강하 게 시사했다. 이 우화는 [근대인에게는] 너무 낯선 것이어서 근대의 해설가 중 누구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기독교에서 희망을 하나의 덕이라고 믿도록 배운 근대정신에 반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그리스인은 미래로 가는 통로가 완전히 닫혀있지 않다고 여겼고, 우리가 [근대인이] 희망을 품는 것에 만족하는 무수한 경우에 대해서도 미래를 탐문하는 것을 종교적인 의무로 간주했다. 이러한 그리스인에게는 아마도 모든 신탁과 점술가들 덕분에 희망이 폄하되고 악하고 위험한 것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분노를 우리와 다르게 느꼈고 그것을 신성한 것으로 보았다. 이 때문에 그들은 분노를 가진 인간에게 나타나는 음울한 위엄을 유럽인이 상상할 수 없는 높은 곳으로부터 보았다.「아침놀」 니체 (옮긴이: 박찬국)


희망이란 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그 믿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희망을 아름답게 그려주는 지금도 희망은 완전히 긍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희망 자체에는 선악이 없다. 희망은 그를 품고 있는 인간의 마음을 따를 뿐이다. 인간의 마음은 나약해서 자주 도망치곤 한다. 도망친 곳에 낙원이 있을지도 모르니. 제우스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절망의 불씨를 세상에 던진 뒤 인간을 장작으로 쓰기 위해서는 희망이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절망의 불꽃이 저절로 꺼질 희망에만 매달리는 동안, 인류는 그대로 불타버릴 것이다.


그러니 판도라가 희망을 남겨둔 채 상자의 뚜껑을 닫은 것은 다행인 일이다. 희망이 세상에 퍼져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인류는 낙관하지 않게 되었으니. 낙관하지 않음으로써 노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노력은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인간을 사랑한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선물로 주었고, 인간을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던 제우스는 인간을 불바다로 던져버렸다. 그 과정에서 판도라는 우연히 희망을 숨겨준 셈이다. 판도라 덕분에 인간은 헛된 희망에 잠겨 불타버리지 않고 불씨를 꺼트릴 방법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 이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해 낼 수 없는 불행도 생겨났다. 낙관 없는 불행 속에서 인류는 절망을 배웠다. 절망은 자주 희망의 모습을 한다. 그렇게 인간은 희망을 미워하게 된다. 이런 과정 속에서 인간은 밑바닥에 있는 진정한 희망을 외면하는 존재가 된다. 제우스가 던진 불행은 좀처럼 꺼질 생각을 않는다.


pandora-s-box-1951(1).jpg!Large.jpg Pandora's Box, Rene Magritte (출처: WikiArt)

판도라에게 살짝 부탁하고 싶다. 다시 한번만 상자의 뚜껑을 열어달라고 말이다. 절망 속에서 우리가 프로메테우스를 미워하기 전에. 더 많은 사람들이 절망을 희망이라 오해하기 전에. 더 늦기 전에 희망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있도록. 그렇게 내일을 살아가게 도와달라고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이 또한 지나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