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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오뚝 Aug 09. 2020

나에게 받은 편지

내가 가장 나다울 수 있는 순간

내 인생에 ‘아이’라는 존재가 들어온 뒤, 엄마라는 이름의 무거운 책임감 때문이었는지 나는 자주 생각에 잠겼다. 복직이 한 달쯤 남았을 때였을까. 얼마 있으면 다시 돌아갈 회사에서 어떻게 하면 잘 적응해 나갈지, ‘엄마’라는 역할이 추가된 인생을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좋을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지는 삶에 대해 자꾸만 심란하고 불안해지던 마음을 다 잡고자 들춰봤던 나만의 글귀가 있다. 

 

풍랑에 요동치는 배처럼 하루하루 불안했던 마음을 잠재워 준 글 귀는, 늘 지나다니면서 보려고 냉장고 문에 붙여 둔 니체의 명언도, 철학 책 속 아리스토텔레스의 한마디도, 조던 피터슨의 ‘12가지 인생의 법칙’도, 김미경 강사의 ‘언니의 독설’도 아니었다. 

 

그 어떤 유명한 철학자나 작가의 글 보다도 나에게 위안을 줬던 건 신기하게도 지금보다도 더 불안했고 어려운 시기를 보냈던 20대의 나에게서 받은 편지다.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손으로 한 땀 한 땀,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나에게 편지를 받았다고 하면 손발이 한껏 움츠려 들만큼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십 수년 전, 어쩌면 나도 그 어색함을 이겨보려 한눈에 금세 들어오는 한국어보다도,  쓰는 데다 읽는데 모두 품이 더 들었던 프랑스어로 적어 내려갔었는지도 모르겠다. 


불란서 공책에 써 내려간 서툰 프랑스어 편지

 ‘30대의 나에게’라고 포문을 열어 정성스레 적어 내려간 글을 읽다 보면 그때 갔던 카페, 2층 창가 사이로 보이던 기차역 풍경, 크레마가 가득한 에스프레소 한 모금과 함께 나온 초콜릿을 베어 물던 내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면서 다시 그때 그 자리로 잠시 돌아간 듯한 기분마저 든다.

 

프랑스에서 교환학생을 마치고 돌아가기 직 전의 나는 충분히 혼란스러웠다. 당장 한국에 돌아가면 뭘 먹고살아야 하는지,  어디에 취업해야 하는지, 취업은 하고 싶은 게 맞는지, 장차 내가 뭘 하고 싶은 지 모르겠다고  고민을 늘어놓다가도, 나를 믿는다고 당차게 선언하는 20대의 ‘나’는 신기하도록 차분하고 확신에 찬 마음으로 30대의 ‘나’에게 너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다독인다. 

 

사랑하는 아이와 남편이랑 행복하게 살고 있으리라 믿는다고, 혹시 아직도 결혼 전이라면 서두르라는 살뜰한 당부도 잊지 않으며  쓸데없는 걱정으로 너를 힘들게 말라고, 너는 모든 걸 해낼 수 있고 너 자체로 특별하고 소중하다고 그리고 ‘너를 믿는다’고 응원해 주고 있었다. 

 

나에게 편지를 쓰는 이유

 

사실,  직장도 있고, 결혼도 하고 아이까지 낳은 지금의 나보다 20대의 '나'가 물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따져보면 훨씬 더 불안하다면 더 불안한 상태임에는 틀림없다. 그런 불안한 세월을 겪고 있는 내가 지금의 나에게 주는 위로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사람의 위로 보다 훨씬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지금 보다 더 불안한 시기도 잘 넘어왔으니, 당연히 앞으로도 더 잘 해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자신감도 생기고, 뭔지 모를 용기도 생긴다. 치열한 삶의 결과인 현재의 나의 모습을 보며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구나 스스로를 한번 더 다독이게도 된다. 

 

또, 그때는 엄청나게 크게만 느껴졌던 일과 고민했던 일들이 지금은 그저 지나간 추억 중 한 조각이 된 것을 보면서, 지금 내가 힘들어하는 일도 과거의 내가 그랬듯 결국엔 내 인생의 한 조각으로 남아 있게 되리라 생각하니 심하게 마음을 쓰느라 괴로워하는 일도 줄어드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또 편지를 쓴다.

 

나는 마음이 복잡 해지거나 정말 힘든 때면 한바탕 글로 쏟아 내곤 한다. 그러면 누구에게 굳이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후련해지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한바탕 길고 긴 일기를 쓰면, 쓰고 난 직후는 후련한데 대부분 일방적인 하소연이나 탄식이 많은 편이라 다시 봤을 때 썩 유쾌하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렇게 ‘쏟아내는’ 일기가 일방적인 기록이었다면, 편지는 상대가 있는 ‘대화’이기 때문에 더 특별한 것 같다.

 

아무리 오랜 세월 함께 한 친한 친구라도, 아무리 같은 집에서 같이 나고 자란 형제, 자매라도 내가 겪어온 세월과 감정, 그 모든 것을 구구절절 다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하고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로지 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나에게 쓰는 그리고 그런 나에게서 받는 편지이기에 특별할 수밖에 없다. 

 

나는 너를 믿어’, ‘너는 할 수 있어’와 같은 별 것 아닌 말들이 주는 엄청난 힘을 알기에, 어쩌면 또 다른 고민과 문제들로 지금의 나를 찾고 있을 10년 뒤 나를 위해서 나는 또 편지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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