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로 통번역대학원에 들어갔습니다.

La patience est amère

by 김오뚝


La patience est amère mais son fruit est doux.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중학교 2학년 정도 되었을 때이다. 신경치료 때문에 치과를 몇 주 정도 계속 방문해야 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마취를 많이 해주지 않았던 지라, 생으로 (?) 고통을 견뎌야 하는 순간들이 꽤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치과는 정말 질색팔색을 하지만, 어쨌거나 이왕 치료를 받아야 하는 바, 빼먹지 않고 꼬박꼬박 갔더랬다. 그때 의사 선생님이 아픈데도 악소리 하나 없이 참아내는 나를 보면서 해주셨던 말이 있다.


"이렇게 참을성이 많으니 앞으로 뭘 해도 잘하겠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 뒤로도 악 소리 나는 상황이 있었지만 일부러 더 꾹 참고 견뎠던 기억이 난다. 그저 지나가는 말로 했던 그 말이 왠지 내내 귀에 맴돌았었다. 그리고 힘들거나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올 때면, 그때 그 순간으로 돌아가서, 조금만 더 참아보자, 그럼 성공(?)하겠다는 일종의 최면을 걸었던 것 같다.



굳센 마음으로 나름 사전 조사까지 하고 회사를 그만두었지만, 막상 통번역대학원을 준비하려니 막막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나 스스로 대학원을 가겠다고 큰 소리를 치고 그만둔 터라, 집에 손을 벌릴 수가 없어 대학원 학비는 학자금 대출을 받기로 하고 (합격도 하기 전에 학비 생각은 미리 했다), 수험기간 동안 들어가는 경비는 1년 남짓 일하면서 조금 모아둔 돈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충당하기로 했다.


독학을 할 것인가, 학원을 갈 것인가 처음에는 약간 고민하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목표가 정해져 있는 곳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자극도 되고 도움도 된다고 생각해서 3월에 퇴사를 하고 4월에 바로 프랑스어 통역대학원을 준비하는 입시전문학원에 등록했다. 영어 같은 경우 통번역대학원 입시 학원이 그래도 꽤나 여러 개 있는 편인데, 프랑스어는 한 곳밖에 없어서 학원을 따로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낮에는 학원 수업을 듣고, 수업이 끝나면 프랑스 문화원으로 가서 저녁 9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공부를 하고 잠에 드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 학원에 들어가 보니, 작년에 떨어져서 재수하는 수강생, 그리고 프랑스 유학생, 졸업 후 바로 대학원을 준비하는 수강생, 나처럼 회사를 다니다 뒤늦게 통번역대학원의 꿈을 가지고 온 사람 등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건 행복한 일이기도 하지만, 정해진 자리 (당시에는 10명에서 13명 정도를 선발했었다) 함께 경쟁을 해야 하는 사이이기도 하니 늘 수업시간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매번 내가 10명, 많이 잡아 13명 안에 드는 사람일까 속으로 생각해보기도 하고.


수업시간은 번역/ 통역이 나누어져 있었는데 통번역대학원 준비과정이다 보니 수강생들과 선생님 앞에서 통역 퍼포먼스를 해야 했다. 처음에는 '메모리 스팬'이라고 해서 기억력을 키우기 위해 노트를 따로 하지 않고 1-2분 정도 되는 텍스트들을 오로지 기억에 의지해서 발화를 해야 했는데, 한국어-한국어도 쉽지가 않았다. 그러니 불어-> 한국어나 한국어-> 불어는 오죽했을까.


나름 프랑스어는 나쁘지 않게 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가 들은 내용을 조리 있게 발화하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았고 그것이 불->한이든, 한->불이든 간에 한국어는 한국어대로 꼬이고 불어는 불어대로 막히고 생각과 입이 따로 놀기 일쑤였다. 통역은 특히 내가 생각하는 걸 외국어로 혹은 한국어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를 듣고 핵심 내용을 잡아 조리 있게 전달해야 하는 과정이라 처음에는 한국어고 프랑스어고 입가에 맴도는 그 말들이 너무 많았다.


발화도 발화인데, 같이 수업을 듣는 사람들이 내가 미처 기억해 내지 못했던 것 그때마다 크리틱이라고 하는 과정을 거치니 수업을 듣고 나면 공부할 것도 많은데, 수업시간에 계속해서 긴장을 하게 되니 수업이 끝나고 나면 기운이 축 빠지기 일 쑤였다. 나보다 더 먼저 수업을 들었던 사람들은 그래도 좀 익숙해졌는지 나보다는 덜 힘들어하는 것 같고, 도무지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처음엔 답답한 마음이 많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뭐 어쩌겠는가, 내가 하겠다고 한 공부를 시작했으니 그저 열심히 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겠다 싶어 무식할 정도로 불어를 끼고 살았다. 잠자는 시간에도 혹시나 귀에 들어올까 싶어 이어폰으로 프랑스어 뉴스를 들으면서 잤던 적도 많았다.


어찌 되었건 절대적으로 인풋이 필요한 시기였기 때문에 많이 듣고, 많이 보는 것에 치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전까지 그저 일상생활을 무리 없이 하는 정도의 불어 수준이었다면, 통번역대학원 입시는 국제 현안이나, 시사 정치 등 사용하는 어휘나 주제들이 다양했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어휘, 표현을 흡수하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처음에는 그저 닥치는 대로 뉴스만 주야장천 틀어놓고 들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나름의 규칙을 세워나갔다.


청취 3 총사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TF1 방송사 (프랑스 최대 규모 채널)의 프랑스 뉴스를 틀어놓고 밥을 먹었다. 다행히 퇴사하기 몇 달 전에 출시된 아이폰이 있어 팟캐스트로 뉴스도 연결되어 TV 뉴스를 볼 수 있었다. 저녁 8시 뉴스를 주로 봤는데, 여자 아나운서의 발음이 너무 예쁘고 멋져서 한 번씩 밥을 먹다가도 한 번씩 그녀의 말을 따라 하곤 했었다. 무엇보다 프랑스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었고 또 화면과 함께 보면 사용하는 어휘가 어렵더라도 이해하기가 수월했기 때문에 후에 대학원에 입학해서도 계속 들여다봤다.


RFI (Radio France Internationale-프랑스 국제방송국)의 Journal francais facile (쉬운 프랑스어 뉴스)도 빼놓을 수 없다. 너무나 친절하게 스크립트를 제공해주는 클립이기에 매일은 아니지만 2-3일에 한 번씩은 스크립트를 먼저 받아서 빈칸을 만든 다음, 들으면서 채우는 식으로 공부했었다.


그리고 대학원 들어가서도 너무나 유용했던 KBS world radio는 한국에서 프랑스어권 청취자를 위한 방송을 만드는 라디오 채널인데 해당 사이트에 한국 관련 뉴스를 프랑스어로 볼 수 있어, 한국어-프랑스어 표현을 익히기에 아주 유용했다. 주로 걸어 다닐 때 KBS world radio 뉴스클립을 많이 들었다.


영화 뽀개기


아무리 좋아하는 공부를 한다고 해도 맨날 사형 제니 유전자 변형이니 같은 문젯거리들만 보다 보면 머리가 무거워지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확 놓아버릴 수도 없어서 찾아낸 게 프랑스 음악이나 영화보기였는데 주말에는 그래도 한 번씩 영화를 보곤 했었다. 그러다 학원에서 프랑스에 한 번도 다녀오지 않은 분이 프랑스 영화를 엄청나게 본 뒤, 프랑스어가 많이 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나도 영화 반복에 들어갔다.


물론 어떤 영화인지가 관건이었다. 당시에는 프랑스 영화가 한국에도 많이 소개되지 않았고, 또 있다 해도 너무 작가주의 적이거나 실험정신이 가득한 것들이라 많이 망설여졌는데, 운 좋게 프랑스 문화원 미디어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덕에 많이 대여되는 프로그램이나 인기 있는 프로그램 위주로 골라보면 그런 리스크는 줄일 수 있었다.


프랑스어 영화는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경우가 제법 있었는데 내가 돌려봤던 영화 중에 하나도 프랑스의 인기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였다. 한국에서는 아멜리에로 잘 알려진 오드리 토투 (Audrey Tautou)와 프랑스의 국민 배우중 하나인 기욤 카네 (Guillaume Canet)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함께 있을 수 있다면 (Ensemble c'est tout)'와 순전히 앞에 표지만 보고 골랐다가 푹 빠진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Il y a longtemps que je t'aime) 이렇게 2개를 6개월이 좀 안 되는 기간 동안 몇십 번 넘게 돌려 본 것 같다.

처음 한 번은 자막 없이, 그리고 두 번째는 프랑스어 자막을 켜놓고 본 뒤, 단어 정리할 때나 과제를 할 때 밤늦게 잠이 안 올 때 기타 등등 시간이 날 때면 그렇게 주야장천 틀어놨다. 그랬더니 신기하게 안 들리던 말들이 하나씩 귀에 꽂히고 (말 그대로 진짜 귀에 딱 들어오는 순간이 있다) 여기서 이런 대사가 있었나 싶을 만큼 선명하게 들려오는 것들이 있었다.


il y a longtemps.jpg
ensemble.jpg
출처: Allocine.fr


언어를 공부하다 보면 어느 순간 지루하게 정체되는 것 같은 순간이 있는데, 이렇게 한 번씩 안 들리던 단어, 표현이 귀에 꽂히면 그때 앞으로 한 발짝 나간 것 같아 그때의 희열은 말로 표현을 못한다. 단어 하나가 뭐라고 희열 운운까지 하느냐 마는, 그때는 그랬다.


그 순간이 생각보다 빨리 올 때도 있고, 느리게 올 때도 있지만 꾸준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찾아오는 순간이 참 귀하고 달콤했다.


어쨌든 그렇게 시간을 쪼개서 프랑스어 아니면 죽음을 달라 할 정도로 프랑스어를 끼고 살았다. 그럼에도 통역은 나아지는 듯하다가도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고 분명히 무슨 말인지 다 알아 들었는데, 한국어로 제대로 발화되지 않는 가하면 입 끝에서 맴돌고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표현도 있었다.


분명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하고 있는데도 슬럼프에 허덕이기 일쑤였다. 한창 다른 친구들은 사회 초년생으로 경력을 쌓고 있는 그때에,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대학원 그것도 '준비생'의 삶은 작은 일에도 위축되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내가 합격이 따놓은 당상으로 보장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원을 다니는 그 시절에 통역까지 잘 나오지 않는 날이면 여지없이 마음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렇게 때때로 나 스스로 마음을 다잡기 힘든 날은 학원 선생님이나, 스터디 멤버들이랑 한 번씩 이야기를 하면서 풀어냈다. 그리고 매번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붙잡고 하소연할 수도 없으니, 잘하고 있는 거라고 스스로를 계속 다독이려 열심히 애를 쓴 것 같다. 어찌 되었건 내가 원하는 일을 준비하고 있고 대학원 입시도 어쨌거나 끝이 있는 싸움(?)이었으니 그 끝까지만 가보면 된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그렇게 나를 다독이면서 하루하루 쌓아갔다.


집에 가면 자꾸 마음이 약해지는 것 같아 수업 전, 후로 출근 도장을 찍던 청계천 앞 카페.

꽃피는 봄날 시작한 수험생활이 카페 밖 창가를 초록빛으로 물들이던 계절을 지나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로 접어들었다. 그 말인즉슨, 시험일이 가까워졌다는 것.


준비 초반에는 열정가득으로 뭐든지 불살을 준비가 되어있었는데 막상 시험이 가까워 오니 내가 그동안 준비를 충분히 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자꾸만 위축되기도 했다. 물론 처음 준비할 때보다는 조금 나아지고 있다는 게 느껴지긴 했지만, 외국에서 살다왔다는 네이티브들도 떨어진다는 그 시험을 국내파인 내가 잘해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나중에는 그런 생각 자체를 없애려고 새로운 텍스트를 보는 대신 내가 정리해 두었던 일종의 오답노트, 표현 정리 노트만 주야장천 들여다보았다. 일부러 영화도 더 많이 보고 그저 긴장을 좀 풀어내려고 했었다.


대망의 시험날, 프랑스어의 특성상 거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원 사람들이었다. 프랑스어 통번역대학원은 한국외국어대학교와 이화여대 두 곳에 있는데 나는 모교이기도 했고 처음 통번역대학원을 꿈꾸게 한 최정화 교수님이 계신 곳이라 처음부터 외대를 생각하고 있었다. 입학시험은 총 2회로 나뉘어 있었고 1차를 합격해야만 2차를 볼 수 있었다. 1차 시험 내용 같은 건 잘 기억나진 않은데, 1차 합격자 발표날에 쫄깃했던 심장의 느낌은 아직도 기억난다.


감사하게 1차 합격을 했지만 더 중요한 건 2차 시험인지라 그동안 써두었던 오답노트 같은 표현 집을 꺼내고 또 꺼내고 최대한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우황청심환을 먹어볼까 했는데, 어느 후기에 보니 미리 먹어보는 게 좋다고 해서 시험 전에 연습 삼아 먹어봤다가 도리어 심장이 더 뛰는 바람에 시험날에는 그저 마음을 편안하게 먹으려고 노력했다.


시험 당일, 불->한 , 한->불 번역 문제와 프랑스어로 서술해야 하는 에세이 시험이 있었다.

통/번역에 치우친 까닭에 에세이에 크게 시간을 할애 하진 못했지만 마지막에 스터디를 하면서 시간에 맞추어 써봤던 경험이 도움이 되었고 워낙 현안들을 돌아가면서 다뤘기 때문에 큰 문제없이 시험을 마쳤다.


오전 필기시험을 마치고 대망의 오후 통역 시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대형 홀에서 순서를 기다리면서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역시나 그때는 신문기사나 책으로만 봤던 최정화 교수님이 계셨고 원어민 선생님 1분 그리고 다른 교수님들 해서 총 4분 정도 시험관으로 계셨다.

하도 오래 전의 일이라 일부러 이전에 학원 카페에 내가 써두었던 합격 수기글을 좀 찾아보았는데 불->한 지문은 SNS에 관한 지문이었고 한->불 지문은 한국의 커피 시장의 성장세 대한 이야기였다. 두 가지 모두 평이한 편이라 큰 어려움 없이 통역했다고 한다만 지금도 기억나는 표현은 한국에 카페가 이미 '포화'상태라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포화'라는 단어를 불어로 생각해내고 그 시험 보는 와중에도 뿌듯했던 기억이 하나 남아있다. 지금 생각하면 별개 다 뿌듯했지 싶다.


그렇게나 초조하게 기다려온, 그렇게나 긴장했던 시험일이었는데, 막상 마치고 보니 허탈하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하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시험장을 걸어 나온 기억이 난다.

합격자 발표까지 거진 1달 이상을 기다려야 했는데,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차라리 그 매를 맞고 싶은데 매를 맞을지 안 맞을지 알 수도 없는 그 상황으로 기다려야 하는 그 한 달이 참 길고도 또 길었다.


그리고 나는 합격했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프랑스어와의 즐겁고도 지난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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