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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TXP Jul 05. 2024

그 시절 나는 무엇을 따라 살았을까?

떠나보낸 젊음에게 보내는 인사


그 시절 나는 무엇을 따라 살았을까?


문득 잊고 지내던 시절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리고 그때 내가 그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떤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 의미 없는 사고실험에 빠져들 때가 있다. 여기 페이스북에는 나의 그 시절이 일부 살고 있다.


다시 돌아올 일이 없고, 다시 돌아가지도 않을 그 시절. 그 시절에 관한 많은 회한들이 내 의식 깊은 어느 곳에 잠들어 있는데, 문득 재채기처럼 그 시절을 떠올릴 일이 생긴다.


그 시절에 관한 후회는 온전히 그 시절에 해당한다. 그 시절 내가 택했던 선택에 관한 후회는 없다. 그 시절의 나는 몹시도 미숙했고 철이 없었으며, 헛된 것을 좇아다녔던 풋내기였기 때문이다.


이따금 젊었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는가를 묻는 일을 TV 쇼에서 본다. 질문을 당하는 이들은 대부분 나 정도 산 사람이다. 나 정도 살고 나면 적어도 미숙의 껍질을 벗고, 성숙으로 향해 담담하게 걸어가는 종류가 된다. 그렇게 살지 못한 자들은, 내가 보는 TV쇼에 나오기보다, 뉴스의 한 대목을 차지하는 자들이다.


젊음은 젊음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다. 젊음에 관한 부러움은 오직 신체에 있다. 몸이 조금 더 생생하던 것 말고, 젊음이 그립거나 부럽지 않다. 젊음의 껍질을 쓰고 한없이 못났던, 미숙하기 그지없던 풋내기 시절은 생각만 해도 소스라치게 된다. 그 시절의 나를 떠나보낸 것이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떠나보냈단 표현은 어떤 면에서는 가식이다. 떼어내기 위해 몹시도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풋내 나던 젊음은 미련과 회한이라는 몹쓸 감정의 소모를 요구한 뒤에야 내게서 떨어졌다. 소모된 에너지, 소모된 시간. 그 모든 몸부림을 고려한다면 젊음으로부터의 이탈은 많은 대가를 치른 다음에야 가능했다.


폐병을 앓고 나면, 가슴에 상흔이 영원히 남는다. 인생에서 젊음의 상흔이 그런 것과 같다. 이따금 엑스레이를 찍을 때에야, 그 시절의 고통이 내 몸과 의식 한 켠에 남아 있다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 그뿐이다. 엑스레이로 보지 않는 이상, 일상에서 다시는 느껴보지 못할 그 시절의 고통. 내게 젊음은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모든 젊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온전히 나에게만 해당할 내가 산 나의 젊음이 그렇다. 조금 더 솔직하고, 조금 더 위선에서 나를 떼어 낼 수 있던, 조금이라도 더 정직했던 내가 내 젊음 속에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았던 내 젊음도 나쁘지 않다.


그 시절 나는 신기루를 따라갔다. 결단코 실현되지 못할 망상을 좇았다. 늦게나마 그 망상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볼 수 있었을 때, 있는 그대로의 인간 군상을 그대로 바라볼 용기를 얻었을 때, 나 또한 그 군상 중의 하나에 불과했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비로소 풋내를 벗었던 것 같다. 그 시절 내가 추구했던 것, 그것을 추구했기 때문에 쏟아부었던 내 삶의 에너지에 관해 미련을 온전히 내려놓았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되었다.


큰 그림으로 보는 인간의 삶은 허망하다. 희망을 찾은 지점은 각각의 한 인간은 결코 그 큰 그림의 일부가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림의 틀에서 벗어나 유령처럼 떠도는 것 인간이라 말하고 싶지 않다. 인생의 지평 위에 발을 딛고 사는 어느 인간도 큰 그림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그림의 한 켠에 작은 붓터치처럼 사는 것이 인간이고 인생이 될 수 있다. 그게 희망이라면 희망이다.


돌아보지 않고 덤덤하게 앞으로 나가면, 그럴 수 있다면 잘 살았다. 잘 살고 있다. 나를 다독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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