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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TXP Jul 01. 2024

질병과 죽음 앞에서 어찌할 것인가?

어느 대학병원 혈액종양내과 항암병동에서 쓰다

아버지 병환으로 지금 종합병원 혈액종양내과 병동에 들어와 있다.


5인실을 사용하고 있는데, 입원하고 계신 지난 열흘 동안, 이런 환자 저런 환자들이 오고 갔다. 상당수는 항암치료를 위해 입원한 경우지만, 두 사람은 이미 더는 손 쓸 방법이 없는 환자다. 남은 치료가 없는 두 사람이 모두 50대 초반이라는 것은 안타까우면서도 놀라운 일이다. 이 둘 중 하나는 우리가 병실에 들어오고 사흘 만에 퇴원해서 나갔다. 옆에서 들으니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어제 오후 입원하여 아버지 바로 옆자리를 잡은 환자는 요양병원에 있기 싫어서 종합병원을 다시 찾은 경우 같은데, 계속해서 마약성 진통제가 들어가고 있는 상황으로 보인다. 분명 아파서 그렇기도 할 것이고, 들어가는 마약성 진통제에 취해서 그럴 것 같기도 한데, 목소리 조절이 안되고, 간병하는 자신의 모친에게 계속해서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오늘 오전 주치의가 들어와서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사실상 지금 병동에서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요양병원으로 가기를 권했는데, 환자가 거부하더라. 그러니 통증 완화차원에서 이 병원의 호스피스 병동으로 안내를 했고, 방금 호스피스 간호사가 와서 상담을 진행하게 되었는데… “호스피스 거기는 죽는 사람들 가는 데라고!” 라면서 상담을 거부했다. 마침 병실을 찾은 그의 부친도 그런 데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옆에서 이런 일을 보고 있자니 남의 일이 아니다 싶었다. 남의 일이 아니라 함은, 오래전 나이 마흔에 암 발견 시기를 놓쳐서 얼마 살지 못하고 간 외삼촌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외삼촌의 마지막도 옆에 있는 환자와 딱히 다르지 않았었다. 삶을 놓기에는 너무 젊어서, 현재의 자기 상태에 관해 의사가 제안하는 것이 너무도 무심하고 무정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으리라.


방금도 병동 간호사가 와서 이 환자에게 아픈 것 참지 말고 자신에게 이야기하면 진통제를 주겠다고 한다. 해 줄 수 있는 일이 고통을 줄여주는 것 말고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환자는 잠깐 병실을 찾은 자신의 부친에게 오징어젓갈을 좀 사다 달라고 몇 번을 부탁했다. 환자의 부모도 이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어서, 오징어젓갈을 사다 주겠다는 말 한마디를 해주지 않는다. 젓갈은 날 것을 발효했고, 소금과 고춧가루가 가득한 음식이니 몸에 좋지 않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옆에서 듣고 있는 나로선,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것을 먹게 했으면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질병과 죽음이 언제나 가깝게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산다. 열흘 가량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버티는 환자들이 가득한 병동에 있으면서 잊고 있던 것을 다시 상기시키는 기회가 된다. 그리고, 잘 사는 것만큼이나 잘 죽을 준비를 철두철미하게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잘 사는 것에도 서툰 내가, 잘 죽는 것을 잘할 수 있을 것인가 장담할 수는 없지만, 마음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제대로 할 수 있지 않겠나 싶다.


아버지도 편찮으시고, 어머니도 쓰러지시고… 이런 상황에 놓인 지 몇 년이 되고 나니, 어쩔 수 없이 의연해진다.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버틸 수 있겠는가? 다 잡을 수도 없고, 다 놓을 수도 없는 것이 인생의 법칙이다. 적절한 선을 타지 못하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 아니겠는가?  옆에서 무너져 가고 있는 동년배의 남을 보면서도 그런 깨달음을 얻는다. 죽음이 죽는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니, 죽음을 직면할 당사자로서의 연습도 충분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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