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는 되는데 공감이 안돼
백 년을 살 것같이 구는 우리지만 의료나 과학의 힘을 빌지 않는다면 과연 얼마나 살 수 있을까요? 끊임없이 장수를 소원하고 행복을 원하며 자아를 찾길 바라는 우리는 까면 깔수록 더 모를 존재입니다. 순수함이 넘실거리는 대양이었다가 바늘 하나 들어갈 수 없는 노랑이가 되고,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했다가도 곧 녹아버릴 마쉬맬로가 돼버립니다. 흠모하는 사람과 오래도록 사는 삶 그 하나가 전부였는데 어느 사이엔 길가의 꽃엔 눈길조차 주지 않는 싸늘한 삶이 전부가 되어있기도 합니다. 도대체 우리의 어느 부분에서 그런 작동을 하게 만드는지 생각해봐도 봐도 신비의 세곕니다.
얼마 전 아침 승강기에서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를 여러분과 나누어볼까 합니다. 바쁜 출근 시간이 지난 그러니까 9시 조금 넘은 시간입니다. 한 꼬마가 마스크 속에 반쯤 튀어나온 입을 감춘 얼굴로 털레털레 승강기에 탑니다. 뒤이어 운동복 차림의 엄마가 머리를 질끈 묶으며 승강기로 들어섭니다. 눈이 마주치자 저와 가볍지만 어색한 인사를 하고는 곧바로 딸의 어깨를 잡고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00야, 왜 어린이집에 가지 않으려고 해?”
“가기 싫어, 엄마랑 놀고 싶어”
“어린이집 갔다 와서 엄마랑 놀면 되지 그렇게 하자”
“싫어, 지금 엄마랑 놀고 싶다고”
아이와 엄마의 신경전이 생각보다 팽팽하여 집중하게 되었고 대화가 진행될수록 슬금슬금 제 얼굴엔 열이 올랐습니다.
“00이가 어린이집에 가지 않으면 다른 친구들이 슬프고 많이 섭섭해할 텐데, 친구들이 슬퍼도 00이는 괜찮아?”
친한 친구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말문이 막힌 아이는 고개만 절레절레 흔듭니다. 무슨 말을 할까? 아이의 대답이 궁금했지만, 승강기의 문이 열려버렸고 아이 엄마가 아이를 냉큼 안고 나가버려서 더는 들을 수 없었습니다.
시간적 여유가 내게 좀 있었다면 아이 엄마와 이야기를 나눴을지도 모릅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고 이해도 공감도 했겠지만 아마도 방금 나눈 대화는 누굴 위한 대화였냐는 본질적인 질문으로 시작했을 것입니다. 아이는 아이의 생각과 감정을 정확히 표현하는데 엄마는 그러지 못합니다. 지금이 아니고 나중에 놀아준다고 그리고 네가(아이) 어린이집에 가지 않는다면 내가(엄마) 힘든 게 아니고 네 친구가 슬프다고 그것도 너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어린이집을 보내고 난 뒤 엄마의 상황에 대해서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란 표현이 이젠 공공연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한 것은 백 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심리적 지배 혹은 정신적 학대로 일상에 만연화되어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묘한 상황 조작에 피해자는 가랑비에 옷이 젖고 있습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속담처럼 겉과 속이 다른 묘한 뭔가가 감정을 건드립니다. 차라리 “어린이집이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가지 않아도 되는 놀이터가 아니라고, 엄마도 너 보내고 청소도 빨래도 하고 커피도 한 잔 마시면서 동네 아주머니들과 수다도 떨며 쉬어야겠다”라고 말하면 나쁜 엄마가 되는 것일까요? 아이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엄마의 감정은 숨긴 채 아이에게 너의 행동은 다른 친구들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은 배려심 없는 태도라며 예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면 우아하고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일까요?
위의 상황이 아이를 키워본 엄마라면 이해가 되고 엄마의 행동도 공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객관화하여 아이와 엄마 둘만의 대화로 본다면 엄마는 아이를 이해는 했지만, 공감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엄마가 마음을 드러내기라도 했다면 아이가 “엄마 그러면 커피 마시고 쉬고 있어 다녀올게”라며 뽀뽀라도 하고 씩씩하게 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내 상황을 이해해주는 것 내가 이해를 받는다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당신이 내 입장이 되어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당신의 공감은 더더욱 감사한 일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