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데우스, 왓챠, 왓챠 플레이
아마존 역시 끊임없이 당신을 연구하고 그 지식을 이용해 제품을 추천하는 알고리즘을 사용한다. 서점에 가서 서가들 사이를 둘러보다가 마음이 끌리는 책을 고른다. 하지만 온라인 서점 아마존에 가면 즉각 알고리즘이 튀어나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과거에 당신이 어떤 책들을 좋아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당신과 비슷한 취향을 지닌 사람들은 이런 신간을 좋아합니다."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오늘날 미국에는 종이책보다 전자책을 읽는 사람이 더 많다. 아마존의 킨들 같은 기기들은 사람들이 책을 읽는 동안 그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킨들은 당신이 그 책의 어던 부분을 빨리 읽고 어떤 부분을 천천히 읽는지 추적 관찰할 수 있다. (중략) 아마존은 그런 데이터를 토대로 당신을 위한 책들을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게 고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당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하면 당신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거나 잃게 할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470-471쪽
이 책을 읽을지는 약 5개월 이상이 지났다. 그런데 얼마 전, 앱을 사용하다가 유발 하라리가 말했던 이야기가 일정 이상 이미 현실로 다가와 있음을 느꼈다. 나는 '왓챠'와 '왓챠 플레이'를 사용하고 있다. '왓챠'는 기본적인 리뷰 앱으로, 영화, TV 드라마, 도서라는 세 가지 카테고리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왓챠 플레이'는 '왓챠'와 연동이 가능한 영화, 드라마 감상 앱이다.
'왓챠'의 첫 화면을 켜면, 세 카테고리 항목이 가장 눈에 띈다. 여기서 도서를 클릭하면 두 번째 화면이 나타나는데, 더 많은 추천받기를 통해 마지막 화면으로 넘어갈 수 있다.
세 가지 화면만으로도 충분히 예상 가능하겠지만, '왓챠'는 끊임없이 "당신"에 집중한다. 모든 화면 구석구석에 "당신을 위해 준비했어요!"라는 메시지를 심어놓는다. "취향을 존중합니다. 대중들의 취향은 아니어도 @@님에게는 맞는 작품들"과 같은 문구를 통해 스스로를 대중의 취향과는 다른 색다른 취향을 가진 인물로 생각하게끔 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남긴 별점과 리뷰를 통해 각각의 책마다 사용자의 예상 별점을 표시해주는 것은 꽤나 설득력 있다.
평소에 별점을 낮게 매기는 것은 아니지만, 5.0점(5점 만점)을 매긴 작품은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약 두 달 전, 예상 별점이 무려 5.0점인 작품이 나에게 추천되었다. "강력 추천"이라는 강력한 문구를 달고 나에게 추천된 그 작품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었다. 예상 별점이 아무리 높아도 만점인 경우는 극히 드물었기에 호기심이 생겨 그 책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결과는, 4.5였다. 훌륭했다. 그런데, 어딘가 께름칙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최근 학교 도서관에서 일주일에 두 편씩 책을 빌려다 읽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예전에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는 방식은 서가를 산책하는 것이었다. 찬찬히 둘러보다 말 그대로 눈에 띄는 제목이 있다면 그것을 골라 들고 살펴본 뒤 빌릴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왓챠'를 켠다. 그리고 나에게 어떤 책이 추천되었는지를 보고 "보고 싶어요"함에 넣어둔다. 그리고 "보고 싶어요"함에 있는 책들 중 도서관에서 대출 가능한 책이 있다면 그 책을 빌린다. 낭만적이지는 않지만 효율적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기 위해 있는 시간은 채 15분이 넘지 않는다. 도서관에 가기 전에 미리 지하철에서 어플을 통해 책을 고른 후,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책을 검색해 도서 청구기호를 캡처해둔다. 도서관에 가서 할 일은 전 주에 빌린 책을 반납하고, 미리 캡처해 둔 청구기호를 보고 책을 찾아 대출하는 것뿐이다. 이러한 삶의 변화는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내가 더 많은 데이터를 내어준다는 것은 나라는 개인을 더 많이 내어준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그럴수록 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나에게 맞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사실은 매력적이다. '왓챠'는 계속해서 더 많은 평가를 할수록 더 정확해진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평가를 늘릴 것을 종용한다. 그런데 그 끝은 어디일까? 빅데이터가 나를 더 잘 알고, 어쩌면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이 궁극으로 갔을 때의 끝은? 그저 더 정확한 정보제공에 그칠 것인가? 유발 하라리가 말한 것처럼, 빅데이터는 신탁에서 주권을 가진 위치로 이동할 것인가?
자유주의가 강조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와 소유권이다. "개인은 개인만의 것"이 자유주의의 주요 테제이다. 나는 나의 것이고 나는 분할 불가능한 개인이다. 쉽게 부정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이제 이 테제가 스러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미 스스로를 공유하는 삶을 살고 있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은 매일매일 나에게 맞춤 광고와, 맞춤 동영상, 맞춤 게시물을 보여준다-설령 잘 맞지 않을지라도. 어떤 의미에서 나는 이미 전 세계에 공유되어 있는 셈이다. 나라는 개인의 가치는 일말의 환상일 수도 있다(책에 의하면).
난 철학과 예술이 인간의 가장 최전선, 언어의 최전선에 있고 그것이 결국 인간의 의미를 지켜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호모 데우스>는 그런 믿음을 모두 부수라고 이야기한다. 책을 읽고 난 뒤 상상하게 된 지구는 고철로 된 형상이다. 푸른 지구가 아닌 회색 지구. 정보와 기계만이 남고 유기체가 사라진 지구. 사실 그것 외에 어떤 모습을 띠게 될지 상상이 안 된다. 사물인터넷이나 정보의 흐름이 가장 중요한 지구에 유기체가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인간은 어쩌면 지구에 시한폭탄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싶다. TV에 나오는 게임처럼, 폭탄을 쥐고 계속해서 옆으로 전달, 또 전달하는 것이다. 언젠가 그것은 터지는데 그 누구도 자신에게서 그 폭탄을 터지게 두려 하지 않는다.
새롭게 도래할 회색 지구에 내가 존재할 곳은 없다. 아직 자유주의와 인간의 의미, 개인의 자아를 믿고 싶어 하는 이에게 회색 지구는 지나치게 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