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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세드 Mar 01. 2019

다시 만난 R도시에서 찍는

2년 만이다. 이 도시에 온 것.

지금 생각해보니 2년 전 왔던 이 도시에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생각보다 없다. 기억에 남는 식당조차 없을 정도라니, 그땐 어떤 여행을 했던 걸까. 멋있어 보이는 것, 여기에 왔었다고 자랑할 만한 사진을 찍는 것. 아마 그런 것이었겠지. 그때의 나는 그게 중요했었으니까.

기억에 나지 않는다. 내가 그때 무엇을 했었지? 어렴풋이 스페인 광장에서 숙소를 같이 썼던 친구와 함께 계단에 털썩 앉아, 시원한 바람과 비릿한 물 냄새를 맡으며 꽤나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던 것 빼고는. 결국 남는 것은 그런 것인가 보다. 찰나의 소중한 경험. 잠깐이나마 그 공간과 시간에 충실했던 시간.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장소에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보내는 데에 충실하는 것. 2, 3년 전에 여행을 떠났던 것과 지금의 여행이 이토록 다르다니. 나 많이 변했구나. 편하다. 아마 앞으로 계속 변화해나갈 것이고 기대가 된다.

2년 전에는 걸어 다녔던 기억도 많이 없다. 아마 교통 통합권 같은 것을 끊고 시간 내에 그걸 최대한 많이 쓰기 위해 가까운 거리라도 매트로를 탔기에 그럴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교통권을 하나도 끊지 않았다. 최대한 예산을 아끼려는 심산이 컸지만 그 참에 구석구석을 걸어 다니려는 목적도 있었다. 오르락내리락해가며 참 많이 걸었다. 그 전에는 이 도시에 이런 언덕길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빨리 걷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걸었다. 평소에 어떤 목적지가 있으면 매우 빠른 걸음으로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목적지에 다다르려는 마음만을 가지고 다니는 편이다. 길거리 곳곳을 보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그렇게 걷곤 한다. 그래서 요새는 여유롭게 걷는 것을 연습 중이다. 언덕길에서 눈을 끄는 곳이 있으면 들어가 본다. 디자이너들이 직접 운영하는 가게에 들어가서 함께 대화하고, 수제 공방을 구경한다. 급할 것이 없다. 자신만의 스타일로 가방을 만들고, 텍스타일을 만드는 디자이너들, 여유로운 시간. 그림을 그리고, 북적이는 것과 차분한 것을 즐기는 시간. 마음에 드는 거리 사진을 찍고, 마음에 드는 구석을 찍고.

이 도시가 좋아진다. 매트로를 탔을 때는 몰랐던 구석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곳곳의 조각, 광장, 음악가, 한 시대와 문화를 이끌었던 이곳의 옛 건물들. 낡은 벽돌, 그리고 커피.

머무는 숙소 사장님이 아침마다 커피를 사주셨다. 매일같이 가시는 곳이라고 한다. 아침을 먹은 후 씻지도 않고 옷만 주워 입고 사장님을 따라나선다. 0.8유로의 커피를 함께 서서 먹고 나온다. 약 20분의 시간. 그 시간이 아침을 깨우고 채웠다. 이제 이 도시를 떠올렸을 때 내가 기억하는 것은 이런 것이겠지. 새로운 사람들과의 대화, 아침 잠깐의 커피를 마시던 시간.

이 공간과 시간을 충실히, 훌륭하지 않아도 풍성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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