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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승창 Dec 31. 2021

김근태 선배와의 인연3

정치인 김근태와의 만남

한동안 김근태 선배를 볼 일은 없었다. 감옥에서 나온 지 4-5년쯤 지나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은 주제가 기억나지는 않는 데, 김근태 선배가 국회의원으로 경실련의 토론회에 패널로 나온 적이 있었다.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었고, 나는 한국 정치에 개혁적인 흐름을 만들어 내려고 고군분투하는 김근태 선배를 응원하는 마음이 컸다. 김근태 선배는 어디서든 마음을 모아 한국사회의 변화를 만들어 내려는 노력을 함께 해 나가자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후로도 간혹 토론회등에서 마주치기는 했어도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는 못했다. 한참을 더 지나 2002년 대선 때 방송진행자였던 나는 출연자로 온 김근태 선배를 다시 만났다. 

당시는 민주당 후보로 선출된 노무현후보의 지지율이 낮아서 정몽준후보와의 단일화문제가 막 제기되던 시기였는데, 김근태 선배는 단일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진행자라서 공개적으로는 어떤 입장 피력을 하지는 못했지만 노무현후보가 민주당의 후보이므로 레이스를 해보기도 전에 단일화 논의를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광고가 나가는 사이에 김근태 선배의 단일화 주장이 그런 점에서 노무현 후보를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후보를 단일화해야만 이회창 후보를 이길 수 있다는 김근태 선배의 생각은 확고해 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고 보면 종내는 단일화가 되기는 했다. 정몽준이 그걸 하루 전에 걷어 차 버리기는 했지만. 그러나 저러나 이상하게 김근태 선배와 나는 생각이나 그때 그때 해야 할 일에 대한 결정이 서로 다른 지점에 있거나 다른 공간에 있었다. 


한결같은 김근태 선배를 늘 대단하다 여겼다. 어려운 과정을 굴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적인 고뇌도 숨기지  않는 모습에 마음이 갔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 생각은 엇갈렸다. 노무현 정부의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일하실 때 백낙청 선생님이 김근태 선배와 식사 약속이 있는 데, 함께 가면 좋겠다 하셔서 동석한 이후로 한동안 보지 못했다. 보건복지부 장관을 그만 두신 후 아프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걱정스런 마음에 의원회관으로 찾아가 만난 적이 있을 뿐이었다. 그때도 괜찮다 하셨고 그런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이미 그렇지 않은 상태였다. 2008년 총선에서 물러 나신 후 몸은 더 안 좋아지신 상태였으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 선 후 모든 민주세력을 모아서 대항해야 한다며 불편한 몸을 이끌고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이야기를 하고 다니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민사회 선배들과도 이야기를 하고 싶다 하셔서 자리가 만들어졌는데, 그 때 정말 몸이 안좋은 것이 확연해서 걱정스러워 했더니 여전히 괜찮다 하셨다. 평생을 민주주의를 위해 살았고, 자신의 모든 열정을 다해 변화를 만들어 왔다는 자부심을 살았던 그에게 이명박 정부는 견딜 수 없는 모욕처럼 느껴졌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늘 그렇게 엇갈리기만 했던 김근태 선배와 생각이 같았던 시기는 딱 그 때였던 것 같다. 민주주의자 김근태선배가 역설하는 모든 민주세력을 모아서 반전의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과 그를 실현할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생각.  

나역시 이명박 정부의  등장으로 한 순간에 그동안 쌓아 온 민주주의 성과들이 무너져 가는 것을 보며 무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백낙청교수님과 박원순변호사, 윤준하대표님, 김정헌교수, 박영숙선생님, 수경스님을 비롯해 시민사회의 원로와 선배그룹들, 백승헌, 남인순, 이학영 등 시민사회단체의 주요멤버들까지 함께 모여  '희망과 대안'을 만들었다.

 흩어져 있던 야당들과 시민단체들이 이명박 정부의 전횡을 막기 위해 함께 논의하는 테이블을 만들었다. 2010년의 지방선거에 대응하는 '연합정치'라는 담론으로 완벽하지는 않지만 전국 곳곳에서 연합공천을 이루어내면서 이명박 정부의 전횡을 일정하게 저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물론 앞서 광우병 소고기 문제로 촉발된 촛불시위가 중요한 전기가 되기도 했지만.

 이 당시 백낙청 교수님이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셨지만, 활동의 담론은 이남주 교수가 만든 셈이었고, 실제 '희망과대안'이 야당을 설득해 만든 테이블에서 협상을 이끈 사람은 백승헌변호사였다. 공동의 정책을 만드는 일에 박순성교수가 역할했고, 온갖 사무는 연대회의의 오성규처장이 맡아 수고했다. 나는 그저 기획자였을 뿐이다.

그런데, 2011년 여름이었을까? 김근태 선배는 연합정치라는 담론을 제기한 이남주 교수와 나를 불러 내 점심을 사주셨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성과를 내도록 만들어 중요한 전기를 만들어 냈다며 두 사람을 격려하고 싶었다면서. 그 때는 이미 김근태선배는 식사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몸이 굳어 가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도 민주주의를 향한 김근태 선배의 열정과 의지는 그침이 없었다.

 그로부터 몇달 후 김근태 선배는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나로서도 그 날의 식사가 김근태 선배와 본 마지막이었던 셈이다. 1988년 민청련 사무실에서 본명도 모른 채 만났던 모임 이후로 늘 엇갈린 생각과 다른 공간에서의 활동으로 자주 볼 수는 없었던 '선배'지만 한결같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현장에서는 마음을 모아내려는 그 의지와 열정은 변함없이 느낄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가까이서 함께 활동을 해 온 사람들의 추모노력에 감사할 뿐이다. 돌아가신 지 십년이 지난 지금도 매년 이맘 때면 문득문득 생각나는 민주주의자 김근태에 대한 나의 추모는 그저 이렇게 간헐적으로 이어졌던 그와의 인연을 짚어 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김근태 선배, 적극적으로 돕지 못해 늘 미안했고, 진심으로 좋아했다. 부디 평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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