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승창 Jan 01. 2022

김근태선배와의 인연2-2

1990년 서울구치소에서 일어난 일 

*2012년 페북에 썼던 글을 약간 수정해서 보탠다.


90년에 난 10개월 가량을 김근태 선배와 함께 있었던 셈인데,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많았고, 얼굴 마주할 기회도 많았다. 아마도 나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의장이나 대표라는 이름보다 '선배'나 '형'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나는 그런 호칭을 스스로 더 원하고 있던 것인지는 잘 알지 못한다. 감옥에서의 김근태 선배의 행동이 그런 위치를 더 좋아하는 것으로 느껴지기는 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당시의 서울구치소에서는 도서열람의 자유 문제로 우리나라 교정행정 역사상 전무했던 양심수들의 교도소 점거농성 사건이 있었다. 나름 '자유'를 확보하고 있었던 양심수들은 교도관과 양심수 사이에 폭력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순식간에 교무과로 몰려들어 점거를 하게 되었는데, 이럴 경우 교도관들에 의한 진압이 이루어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고, 그 과정에서의 불상사도 충분히 예측되는 상황이었다. 실제 교도관들은 사과탄을 터뜨리고 무장한 채 진압을 시도했고, 그 과정에서 함께 농성하고 있던 민자당사 점거농성 사건등 으로 구속된 학생들과 교도관 모두 다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김근태 '정도'의 사람이면 굳이 현장에 오지 않아도 누구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근데, 김근태 선배가 어느 샌가 내 옆에 계신 것이었다. 아니 뻔히 진압될텐데... 다치시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아니 왜 오신거야?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진압되기 전까지 내내 특히 대학생 친구들 다치게 될까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소식을 들었을 때 당신의 감옥경험으로 보면 사건의 추이가 충분히 예측되었을 것이므로 오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후배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후배들에 대한 걱정으로 뻔한 결말이 예상되는 자리를 함께 지키신 것이었다.

그래도 나름 구치소에서는 김근태 선배를 대우를 한 셈인데, 징벌방 대신 당신의 방으로 데려다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김근태 선배는 그게 더한 징벌이었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후배들과 함께 있는 것이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손이 뒤로 묶인채 잡혀 있다 하룬가 이틀이 지나서 손 묶인 것이 풀리고, 사흘인가 지나서 징벌방에서 나오게 되었다. 마침 그 때 지금은 대학생이 된 우리 아이가 태어난 날이기도 하였다.

 원래 있던 방으로 돌아왔는데, 김근태 선배는 정말 차분한 어조로 다음날 부터의 징역살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 지-지금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야기 해주고 그 사흘간 내가 못들었을 관련한 소식들, 바깥의 사람들과 자신이 구치소측과 협상한 이야기 등등을 자세하게 들려 주었다. 

아마 그 일이 김근태 선배가 나와의 첫 만남에서 내가 가졌던 '무게 잡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김근태라는 사람을 제대로 본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서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감을 떠나게 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김근태 선배와의 인연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