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서의 인연
감옥 생활중에서 옥투위 관련한 활동에서 김근태선배를 알 수 있는 때가 있었다. 성명서를 작성하면서 느낀 것이었지만 김근태 선배는 단어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도 신중했고, 치밀하기도 했다. 자신이 처한 현실의 변화를 위해 이상을 향한 '파토스'를 가져야 한다고 하시면서도 현실의 제 세력들이 갖는 힘의 한계에 대해서도 냉정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했다.
물론 때론 함께 노래도 불렀고, 언제나 먹을 것이 있으면 나누어 주시기도 했다. 이감가는 운동권 후배들의 소식을 꼭 물었으며, 당신이 아는 소식은 늘 알려주시기도 하였다. 때론 이감가는 후배들에게 조용히 속옷 같은 것을 전달해 주시기도 하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서울구치소가 양심수들의 점거농성사건으로 분위기가 싸늘해지면서 재판이 끝난 사람들은 신속하게 이감을 보내게 되었는데, 공교롭게 김근태 선배와 나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안양교도소로 함께 이감을 가게 되었다.
안양교도소에서의 기억이 하나 있는데, 그 곳에서는 함께 농구같은 것을 할 수 있었다. 김근태 선배, 소년수들과 농구하면서도 절대 대충하는 법이 없었다. 그 젊디 젊은 친구들과 똑같이 뛰고 부딪히는 것이다. 당연히 때론 소년수들의 거친 플레이에 다치기도 하셨는데, 개의치 않으시고 그야말로 소년수들과 함께 '놀았다' 오 저런 천진난만함도 있으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일들이었다.
아 김근태 선배 축구도 농구도 공을 가지고 하는 구기운동은 꽤 잘하신다고 보면 된다. 교도소에서는 함께 축구도 농구도 했었는데, 바깥 세상에 나와서는 김근태 선배와 한번도 운동을 같이 한 적이 없다.
짧은 안양교도소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형이 확정되면서 나는 먼저 목포로 떠나면서 김근태 선배와의 인연도 그렇게 마감되는 듯 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면회를 와달라 하시면서 감옥에서 맺은 인연을 이어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