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육我일기

+13 그것은 호르몬일 뿐이로다

산후우울증

by 갱그리

이렇게까지 절실하게 한국이 떠나고 싶었던 때가 있었을까. 한국을 떠날 수 없다면 모든 육아휴직을 반납하고 복직이라도 하고 싶었다. 나는 내가 스스로 붙인 '어머니'라는 명찰을 떼어내고 싶었다. 지금까지 내가 일궈 왔다고 생각한 모든 것 속으로 도망가고 싶어졌다.


조리원에 있는 동안 짬이 나는대로 프로그래밍 서적을 뒤적이고, 웹툰을 보고, 책을 읽고, 리뷰를 어떻게든 적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그런지 글은 잘 나오지 않았다. 프로그래밍도 마찬가지였다. 코드를 짜다보면 어느 순간 멍해졌다. 아기를 낳은 지 겨우 2주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산부인과 정기검진에서 몇 달 간 나를 따뜻하게 봐 주신 주치의 선생님을 만나자 눈물이 울컥 나왔다. 진료실에 들어가 엉엉 울고, 나는 선생님의 토닥임을 받으면서 신경정신과 진단 의뢰서 한 장을 받아 나왔다. 눈물이 쏟아져 나간 만큼 마음에서도 무언가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지인들과의 연락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조리원에서 나는 단체 프로그램도 참석하지 않고, 산모들과도 이야기하지 않으며, 컴퓨터 아니면 핸드폰만 잡고 있는 불량 산모였다.


시작은 모유 수유였다. 모유 수유에 대한 두려움은 출산 전부터 있었다. 여러가지 신체조건 때문에, 그리고 지금껏 먹어왔던 약 때문에 모유가 안 나올 수 있다고 미리 경고 받은 터라 진작부터 대비하고 있었지만 모유가 나오는 상황에서도 내가 모유 수유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건 나 스스로 납득되지 않았다. 나는 내 몸에서 모유가 나온다는 사실 자체를 끔찍하게 싫어하고 있었다.


아기가 가슴에 달라붙어 오물오물 먹는 모습은 예뻤다. 아기의 머리에 코를 대었을 때 맡아지는 우유 냄새도 달콤했다. 아기를 보면 절로 예쁘다 소리가 나오는데, 이상하게 아기가 예뻐보일 수록 심하게 우울해졌다. 나는 이전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나는 이전처럼 회사를 다니고, 글을 쓸 수 있을까. 이제야 조금씩 갈피를 잡아가는데 여기서 몽땅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온갖 질문들에 사로잡히다 보면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더라도 마음으로는 불안에 휩싸였다.


여태 동고동락해온 남편에게 미안하지만, 정말 모든 것을 다 내던지고 다시 혼자였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곳으로 떠나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마음으로도, 몸으로도. 그러다보면 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혼자 울다 보면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산모님, 지금 수유하실 거죠?"


나는 이 시간을 이겨낼 것이다, 언제나처럼. 그러나 이기는 것이 의미가 있는 걸까. 아무 것에도 힘을 내고 싶지 않다. 내게 온 모든 축복들을 뒤로 하고, 내 마음은 계속해서 '돌아가고 싶어!'를 반복해 외친다. 이 외침 앞에 나는 그저 무력하게 주저앉는다. 아는 언니가 산후우울증을 심하게 겪었다고 했을 때, 나는 이것이 내 일은 아닐 줄 알았다. 겨우 호르몬의 일일 뿐일텐데, 이건 그냥 호르몬의 영향일 뿐일텐데, 내 마음이 아닐텐데, 하고 수십번 되뇌어도 우울은 떠나지 않고 계속 여기에 있다. 좋아하는 티비 프로를 봐도, 아기 냄새를 맡아도, 남편을 안아도, 따뜻한 살결들이 옆에 있는데도.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기도다. 이 마음이 떠나게 해 달라는 절실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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