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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갱그리 Dec 17. 2015

+84 내게는 인내, 아기에겐 평화

지난주 토요일은 드디어 친정에서 방 빼는 날, 잠에서 깬 아기의 울음소리를 시작으로 부지런한 아침 일과가 시작되었다. 친정에서 가깝지 않은 거리였지만 짐을 옮기고 정리하고 친정에서 가져 온 아기 빨래까지 널었는데도 두어시간 정도 흘렀을 뿐이었다. 아기는 차를 타고 이동했던 시간들이 힘들었는지 금방 곯아떨어졌다. 짐 나르고 정리하느라 힘이 빠져버린 건 우리도 매한가지여서 아기와 함께 드러누웠다. 세 시간동안 달고 단 낮잠 속에 빠졌다.


정신 없이 자고 일어나니, 정말 이제는 우리 세 가족 뿐이었다. 어른 넷이 아가 한 명에 달라 붙어 서로의 품과 품을 옮겨다니며 아가를 돌보았던 시간이 끝났다고 생각하니 어딘가 두려워졌다. 하지만 감정에 오래 빠져있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주말은 그럭저럭, 매우 바쁘게 흘러가 버렸다.


그리고 시작된 월요일은, 이제 그야말로 오롯이 아기와 나 둘 뿐이었던 첫 날이었다. 주말에 체력을 충전해놓은 덕택인지, 아니면 '첫날'이 주는 파이팅 덕택인지 첫째 날은 제법 수월했다. 많이 지치지 않았고, 아기가 자는 사이 샤워도 하고, 머리도 하고, 예쁜 실내복까지 꺼내 입는 여유를 부렸다. 아기 젖병을 소독하고, 아기 빨래를 척척 삶는 나 자신이 너무 뿌듯해서 어디다 자랑하고 싶을 정도였다. 나 이렇게 잘하고 있어요, 라고.


그 다음 날엔 예방접종을 맞히러 혼자 아기를 안고 보건소에 갔는데, 그날따라 보건소에 아기를 혼자 데려온 사람은 나 뿐이었던데다가 사람도 많았다. 게다가 택시 안에서도 엄청나게 울어댔기 때문에 아기도 나도 한 시간 외출에 온통 진이 빠져버렸다. 초죽음,이 될 뻔했으나 오후에 방문하신 친정 부모님 덕택에 간신히 기운을 회복했다. 한두시간 수다를 떨었을 뿐이고, 그 사이 잠깐 아기를 봐주신 것 뿐인데 힘이 넘쳤다. 즐거웠다!


세번째 날. 예방접종 다음날이어서였는지 아기는 낮 내내 자다가 갑작스레 소리를 지르고 안았다가 내려놓으면 울기를 반복했다. 내 몸도 몸이지만 아기의 몸이 유독 안 좋아보여 크게 걱정됐다.


그리고 넷째 날인 오늘. 오늘은 아기를 재우며 오랫동안 기도를 했다. 기도 뿐만이 아니라 찬송가도 부르고, 성경도 읽었다. 수 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예배 시간도 아닌 때에 내가 성경을 찾아 읽고 찬송가를 부르다니...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여섯 시간이 넘게 보채는 아기에게, 죄도 없는 그 어린 몸에게 화를 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한 문장을 오래, 천천히 되뇌었다. '하나님. 제게는 인내를, 아기에게는 평화를 주세요.'


아기를 업고, 오래 전 렉시오 디비나를 배울 때 주로 묵상했던 <마가복음>을 펼쳐 읽었다. 찬송가를 부른다고해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금방 멈추고 기적처럼 잠에 들었던 건 당연히 아니었지만(오히려 평소보다 더 오래 보챘던 것 같다) 적어도 내가 아기에게 화를 내진 않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오늘은 뿌듯하게 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피로에 찌든 와중에도 이 글을 꾸역꾸역 쓰는 것이다. 오늘만큼은 여유가 아닌, 정말이지 생존의 글쓰기랄까.


p.s 그나저나 <마가복음>을 읽으며 정말... 예수님을 비판하던 사람들이 좀 이해가 됐다. 중요한 규율이란 규율은 다 어기고, 하지 말란 건 다 하고, 그러면서 말 한 마디 지지 않는 예수님이라니. 당대인들에게 인내심을 요한다는 데서 어쩌면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닮았다.. ㅎㅎ 난 그 시대에 있었으면 예수님 제자가 될 수 있었을까? 대답은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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