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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육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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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갱그리 Dec 26. 2015

+91 크리스마스엔 커피

회사를 다닐 적, 나는 하루에 최소 두 잔 이상의 커피를 마시곤 했다. 아침에 출근할 때 사오는 커피 한 잔, 그리고 점심 식사 후에 한 잔. 시간이 허락한다면 오후 세네시경에 다시 한 잔. 처음에는 나른함을 쫓기 위함이었지만 어느샌가부터는 마시는 일 자체가 습관이 되어버린 탓에 그다지 피곤하지 않더라도 꼭 무언가 마실 것을 찾게 되었다. 임신한 이후에도 커피만 마시지 않았을 뿐, 하루에 두 번은 카페를 방문하여 과일 주스나 차 종류를 주문하는 일상은 늘 한결 같았다.


그렇지만 아기와 단 둘이 집에 있는 생활에서 카페를 찾는 건 일주일에 한 번 정도나 가능한 일이었다. 일단 가장 가까운 카페가 마을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은 가야 있었고, 아기는 늘 자동차만 타면 울어댔기 때문에 택시도 어려운데 버스는 엄두조차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에 사다 둔 믹스커피로 근근히 때우다가, 그마저도 탈 정신이 없어서 커피우유로 종목을 바꾸다보니 엊그제는 폭신한 우유거품을 얹은 라떼가 간절해졌다. 이렇게 간절하게 원해도 내게 소원을 들어 줄 우주는 없기 때문에 우유거품기를 사야하나, 엉뚱한 방향으로 자급 자족을 알아보다가, 얼마나 먹겠냐는 생각에 다시 마음을 접어버렸다. 눈 딱 감고 아기를 안은 채 카페에 가고 싶었지만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았다.


종종 카페에는 유모차를 끌고, 아기띠에 아기를 안고 나온 엄마들이 삼삼오오 그룹지어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아침과 점심 사이, 혹은 점심과 저녁 사이의 시간에 종종 보이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전업주부들은 여유롭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내가 지금 이 상황에 놓여보자니 그것은 필사적으로 쟁취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불가능한 것이다. 아기와 한 번 외출하려면 외출짐을 챙기는 것부터가 일이고, 아기가 바깥에서 울어제끼면 주위의 눈칫밥을 먹으며 얼른 달래야 하는 용기까지 모두 다 끌어안아야 한다. 미혼일 때, 혹은 아기가 없었을 때 즐기던 그 커피 한 잔, 카페의 분위기를 한 번쯤 누리는 대가로 치르자니 좀 비싼 것 같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해서 참고 참다가 터진 어떤 날에나 시도할 수 있는 일이랄까.


커피가 정말정말 먹고 싶었지만, 만약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면 아기를 꽁꽁 싸매고 나갔겠지만, 아직은 그만큼 원한 건 아니었는지 어쨌는지 나는 결국 버스를 타고 나가야 하는 이 마실을 포기해버렸다. 대신 친구와 가족들에게 징징대는 방법을 선택했는데, 당연히 누군가 커피를 들고 나와 아기만 덩그러니 있는 이 섬 속으로 와줄 거란 기대는 일절 없었다. 그냥 한두번 징징거리면서 마음만 알아주길 바랐을 뿐.


그런데 아무도 답변조차 없더니, 두어시간 정도 후에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친정아빠였다. 지금 회사에서 퇴근하는데 커피를 갖고 가겠다는 전화였다. 뜻밖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얼떨떨하니 반겼는데, 오십분 정도 후에 아빠는 정말로 왔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아빠는 내게 분홍색 보온병을 내밀었다. 회사 여직원 것을 빌린 것이니 돌려줘야 한다며, 어디다 얼른 담으라기에 얼른 찬장 속에서 보온병을 찾아 꺼내 부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대번 등을 떠밀며 커피 마시면서 바람 좀 쐬고 오라시길래, 보온병을 든 채 문 앞에 나가게 됐다. 겨울이었지만 유난히 따뜻한 날이었다. 햇볕도 좋았다. 그래도 어딘가를 가기는 좀 그래서 보온병을 든 채로 현관문 앞을 서성였다. 집 밖 풍경이라봐야 동네 산 중턱과 지상주차장을 바쁘게 오가는 차들 몇 대 뿐이었지만 기분 전환하기엔 충분했다. 정말 내 취향이 아니었던 쓰디 쓴 아메리카노였지만 향은 정말이지 좋았고, 바람도 서늘하게 불어왔으며, 무엇보다 이 커피 한 잔을 내게 주기 위해 쉽지 않은 길을 달려온 친정아빠가 너무 고마웠다.


아기는 십분 정도 후에 울기 시작했다. 현관문 밖으로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자 나는 짧은 휴식시간을 접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기를 달래 재우고, 친정아빠와 삼십 분 정도 담소를 나눈 뒤에 아빠는 다시 친정으로 돌아갔다. 오늘 야근이라던 남편은 퇴근 소식이 없었지만 기분은 풍요로웠다.


그리고 바야흐로 크리스마스 이브, 분에 넘치게도 이번에는 친정엄마가 찾아와 커피 마실 시간을 주었고 친정엄마가 돌아간 오후에는 반차를 받은 친구가 카라멜 마키아토를 두 손에 들고 방문했다. 게다가 저녁엔 남편이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브랜드 커피숍에서 판매하는 커피 티백과 브랜드 텀블러를 내밀었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 커피향이 집안에 가득 차고 넘쳤다. 그야말로, 크리스마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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