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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갱그리 Jan 18. 2016

+116 만납시다 우리

아기가 태어난 지 백일이 넘었지만, 아기를 데리고 외출한 건 여전히 손에 꼽았다. 그나마도 시댁 혹은 친정에 아기를 데려가거나, 보건소에 예방접종을 맞히러 가는 일 외엔 외출한 적이 전무했다. 날씨가 추워 행여나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했고, 아기를 데리고 외출하자니 외출짐을 싸는 일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개 사람을 만나는 건 아기를 남편에게 맡기고 나서거나 혹은 지인들이 아기가 있는 우리집으로 선뜻 놀러 와주었을 때 뿐이었.


지인들이 집으로 방문하는 건 정말 큰 힘이었다. 굳이 아기를 대신 봐주지 않더라도 말동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야근 중인 남편이 퇴근할 때까지 함께 옆에 있어 준 친구도 있었는데 그날은 그 친구와 점심과 저녁을 두 끼나 함께 먹으며 마냥 즐겁게 보냈다. 그날따라 아기는 유난히 낮잠을 자지 않았고, 잠에서 계속 깨면서 보챘지만, 몸이 힘들지언정 마음이 힘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한파가 급습한다는 이번 주, 놀러 온다는 지인이 없던 터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나는 용기를 내어 다른 집에 찾아가기로 했다. 우리보다 3개월 먼저 아기를 낳은 집이었는데, 고된 회사 생활에서 늘 힘이 되어 주고 함께 곁에 있어 준 선배였다. 공교롭게도 임신 기간이 겹쳐 임신 동지로 함께 동고동락하기도 한 사이였다. 선배의 집은 우리 집에서 차로 삼십분 정도 거리로 그다지 멀지도 않았다.


아기가 자동차만 타면 늘 울었기에 택시를 타며 잔뜩 긴장했는데, 다행히 아기는 순순히 잠에 들었다. 기사님도 친절하셔서 회사 선배네 아파트 지하주차장까지, 그것도 단지 입구까지 찾아 내려주었다. 선배네 집으로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마음이 두근거렸다. 아기에 대한 불안함보다 오랜만에 선배를 만나고, 또 선배네 아기와 우리 아기를 함께 놀린다는 생각에 설렘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리고 이윽고 만난 선배.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문이 트여 마구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기들도 서로를 의식하는 듯 하더니 각자의 장난감과 각자의 엄마에게 매달려 놀았고, 우리는 아기를 매단채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배와 대화하던 중 가장 슬펐던 건 '우리, 이대로 여자임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에 대한 것이었다. 선배도 나도 출산 후 탈모 증상을 겪고 있었고, 둘다 늘어진 맨투맨을 입고 있었다. 예전에는 오피스룩을 각자 차려입은 채 풀 메이크업을 하고 하이힐까지 신고선 대화했는데, 그러고보니 이런 서로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기를 안아야 하기 때문에 면 재질 옷만 입어야하고, 아기를 안으면 윗옷이 올라가기 때문에 치마나 원피스는 입지 못하는 우리. 염색도, 파마도 당분간은 금지된 우리. 아주 가끔 있는 결혼식에 참석할 때에나 예쁘게 하고 가고 싶은데, 아무리 예쁘게 꾸미려고 해도 아기에 치여 시간이 정 안난다는 우리의 이야기.


예전과 너무 달라졌지만 그래도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큰 위안이었다. 마침 칼퇴근한 남편의 차로 아기와 함께 돌아오면서, 정말 오랜만에 오후 시간이 빨리 갔다고 느껴졌다. 나는 모처럼 수다 주머니를 털고 들어와 한결 가벼운 마음이었고, 우리 아기는 아기대로 그날 드디어 뒤집기에 성공했다. 선배네 집에서 3개월 앞선 아기의 뒤집기를 내심 유심히 보더니만, 아기들도 서로에게 자극을 받는 건가 싶어 웃음이 나왔다.


선배네 집에 외출했던 그날 이후 나는 사람들 만나는 것에 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이번 한파가 지나가고 날씨가 다시 따뜻해지면, 또 선배네 집에 놀러갈 생각이다. 남편이 휴가인 날에는 아기를 데리고 마트도 나가야지. 이렇게 하루하루는 좀 더 행복해질 것이다. 어제보다 오늘 더, 그리고 오늘보다 내일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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