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육我일기

+126 자가정화의 시간

by 갱그리

출산을 한 뒤 백일 무렵이 되면 산모의 머리카락이 숭덩숭덩 빠지기 시작한다. 내 경우에는 80일 경부터 탈모가 찾아왔다. 어느 날인가 샤워를 하고난 후 보니 화장실 바닥 뿐 아니라 벽면까지 머리카락으로 뒤덮여 있었다. 곧 탈모가 찾아올 것이란 사실을 예측하곤 있었다해도, 흡사 호러영화의 한 장면 같아 뜨악하게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부턴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청소가 되었다. 잠에서 깬 아기에게 우유를 먹이고, 아기는 마루의 바운서에 태운 뒤 나는 침실로 돌아온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 후 이불을 탈탈 털면 머리카락이 나풀나풀 날리며 바닥에 가라앉는다. 그런 뒤 청소기를 돌리는데, 이제는 뭔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쾌감마저 느껴질 정도다. 바닥을 메운 머리카락들이 청소기 안으로 쏙쏙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사무실에 제일 일찍 출근해 여유롭게 모닝 커피를 마시는 것 같은 상쾌한 기분이 든달까.


처음에는 머리를 감고 난 뒤 바닥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보며 한숨만 쉬어댔었다. 도대체 이놈의 출산 과정은 언제 끝나는 것인가. 뱃살은 늘어져서 들어갈 생각조차 없어뵈고, 가뜩이나 엉망인 헤어 스타일은 탈모에 비어만 가고.. 그런데 지금은 그 동안 상했던 머리카락이 다 빠져나가고, 건강한 머리카락이 새로이 돋아나는 과정으로 여겨진다.


같은 맥락에서, 아기를 데리고 외출을 할 수 없는 게 답답하기만 했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예전에는 늘 밖에 나가서 쇼핑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외식을 했다면, 지금은 집에 앉아 책을 읽고 집안일을 하고 집밥을 먹는다. 아기가 자는 시간엔 늘 책을 읽거나 혹은 글을 쓰고 있어 회사를 다니던 때보다도 문장에 매진하는 시간이 더욱 길어졌다. 음식도 대체로 친정엄마나 시어머니가 해주신 반찬에 밥, 국을 다 챙겨 먹기 때문에, 아기 때문에 급히 먹다 체하는 일은 있을지언정 영양 부족은 없을 것 같은 기분도 든다.


그러니까 산후에도 이어지는 이 기나긴 출산의 여정이 어쩌면 나의 정화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소비에 길들여지고 바깥 문화에 푹 젖었던 지난 날들과 멀어져, 몸과 마음에 스며든 이물질들을 천천히 비워내는 시간. 그리하여 다시 머리보다 마음을 쓰고, 사무적인 대화보다 사랑의 언어로 이야기를 한다. 아기를 위해서, 라고 덧씌워진 이 시간이 사실은 나를 되살리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외면은 초췌하고 비루하더라도 지금의 나는 이대로도 또 괜찮은 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