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이 없어진다고 했다. 여기부터 한참 아래까지 집과 골목을 지워낸 후 커다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예정이었다. 8년동안 길렀던 개가 집을 나가 찾으러 돌아다녔던 골목들, 일찍 헤어지기 싫었던 친구와 한참이나 수다를 떨었던 집 앞 계단, 깊은 새벽 남몰래 UFO가 내려앉을 것 같은 빈 공터, 상수동 뒷골목 전경이 한 눈에 보이는 언덕도- 모두 없어진다는 이야기였다.
나를 길러냈던 공간들이 없어진다는 말에 신경 써서 작별 인사를 준비하고 싶었지만 당시의 나는 기나긴 신입사원 합숙 훈련에 정신이 빠져 있었다. 하필 수능 직전에 집을 나가 나로서는 제대로 마음을 정리하지도 못했던 우리집 강아지와 마찬가지로, 나는 십 여년을 살았던 우리 집 또한 안녕이란 말 한번 제대로 못한 채 떠나보냈다. 어느 날 신입사원 연수가 마친 뒤 짐을 챙겨오니 원래 살던 곳은 공사장으로 변했고, 나는 낯선 아파트의 낯선 방에 내 짐을 풀었다.
처음 동네가 그리웠을 땐 내가 누비고 다니던 골목 하나하나가 떠올랐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특히 재개발된 아파트로 다시 입주하고나서는 - 이 골목들에 있었던 가게들, 가게의 아줌마 아저씨들 얼굴이 하나 둘 생각나기 시작했다. 어떤 얼굴들은 아파트에서 다시 만났지만, 어떤 얼굴들은 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 마주치지도 못했던 것이다.
학교가 파하면 신발주머니를 앞뒤로 흔들며 횡단보도를 건너는 나. 홍은문방구에 들러 아줌마에게 인사를 하고, 조금만 더 걸으면 다림질 스팀이 물씬 올라오는 제일세탁소가 나왔다. 제일세탁소 옆으로 좀 더 걸으면 친구네 아버지가 하는 목공소가 있었는데, 홍익대학교에 재학하는 학생들이 필요하다는 여러 소품들-액자나 테이블, 혹은 전시에 필요한 물품들-을 주문받아 만들어주곤 했다. 아저씨가 손수 만들어 주셨던 우리집 책장은 민트색 페인트로 덧칠되어 있었는데, 페인트가 까지고 까져 다시 나무색이 드러나도록 나는 그 책장을 사랑했다.
제일세탁소와 목공소 사이에는 골목으로 내려가는 언덕이 있었다. 언덕 옆으로는 계단이 나있었는데 그 조그마한 사잇길에 만화책 대여점이 있었다. 나는 여기서 당시 유행했던 순정 만화들 - <얼음요괴 이야기>, <천사의 립스틱>, <프리티> 등을 빌려보았다. 대여점을 지나면 우리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이 곧바로 나오지만, 그 골목길에 들어서기 전에 나는 늘 상수마트에 들러 커피우유를 샀다. 상수마트 가는 길엔 충남쌀집, 남원추어탕이 있었다. 충남쌀집 아저씨는 우리 동네의 통장이었다. 아저씨는 쌀집 앞에 놓여진 평상에서 막걸리를 마시기도 하고, 바둑을 두기도 했다.
한번은 누군가 배스라는 물고기를 아이스박스 가득- 가져왔었다. 붕어낚시를 갔다가 배스만 잡았다며 우리집에게 나누어 줬는데, 너무 양이 많아 처치곤란이어서 아빠가 통장 아저씨를 찾아가 상의를 했다. 그랬더니 통장아저씨는 뭐 별일 아니라는 듯이 배스를 가져오게 해서 한솥 가득 매운탕을 끓였다. 그리고 주변의 가게들, 골목골목의 사람들을 다아 불러모아서 평상에서 매운탕을 나눠먹었다.
남원추어탕은- 나중에 알았지만, 홍익대 미대 교수인 안상수 교수의 단골 집이라고 했다. 엄마가 이상한 모자를 쓴, 세련된 할아버지가 자주 온다고 했는데 안상수 선생님인 걸 알고 깜짝 놀랐다. 나는 추어탕을 잘 못 먹어서 엄마와 그 집에 가면 콩나물국밥을 시켜 먹곤 했다.
우리 동네엔 채 삼십미터도 안되는 거리를 두고 구멍가게가 세군데나 있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덴 상수마트였기에 거길 자주 갔는데, 때때로 중간에 있었던 구멍가게도 갔다. 거긴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아들인 아저씨- 2대가 같이 살면서 집 겸 가게로 쓰고 있었다. 구멍가게 안쪽엔 방문이 있어서, 계산대에 아무도 없을 때 '할아버지-' 부르면, 방문을 열고 할아버지가 나와 말 없이 계산해주셨다.
골목의 끝엔 내가 십년동안 다니던 예리 피아노 학원이 있었다. 방학이면 나는 곧잘 아침 여덟시에 찾아가서 원장 선생님을 깨웠다. 그러면 원장 선생님이나 원장 선생님의 딸인 예리 선생님이 잠옷 바람으로 눈을 비비며 문을 열어주셨다.
마치 양귀자의 소설 <원미동 사람들>처럼 그 외에도 숱한 추억이 깃든 가게들이 많았다. 사잇길로 내려가면 나오는 노래방엔 연휴가 되면 늘 친척 동생들과 함께 갔었다. 그 옆엔 늘 싱싱한 야채와 과일을 파는 야채가게가 있었고, 생닭과 계란만 파는 닭 가게에서 종종 심부름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이 모든 골목들, 가게들이 비슷비슷한 아파트 단지로 변했다. 상가 건물에 브랜드 빵집, 대형 마트, 키즈 카페가 들어오긴 했지만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든다. 내 고향이랄게 없어진 상실감이랄까.
그러나 이 상실의 역사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상수동은 오래 정붙이던 가게들, 아니면 생긴 지 얼마 안됐지만 내 추억이 깃든 가게들 모두 임대료의 압박 혹은 여러 사정으로 인해 계속해서 폐업하는 동네가 되었다. '뜨는 공간'이면서 내 추억은 늘 '지는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이라도 상수동의 가게들을 기록하려고 한다. 이건 미처 인사하지 못했던 우리 집에 대한 뒤늦은 이별식이기도 하다. 나 혼자 기록하는 것은 아니다. 상수동 토박이였던 나의 아빠와 함께 글을 같이 연재할 계획이다. (물론, 상수동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 가능한 매거진이다! 상수동에 거주한 것과는 상관 없다. 나도 지금은 상수동 주민은 아니다.) 아빠와 나는 문체가 많이 다르고, 감성도 달라 어떤 매거진이 될 지 모르겠지만 여기에 차곡차곡 우리의 공간들을 쌓아보려고 한다. 이것이 하나의 기억이 되었으면, 그리고 누군가의 추억을 소중하게 여겨주는 창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누군가에겐 단순히 돈벌이겠고, 누군가에겐 인생을 건 도전이기도 한 당신의 공간들이 내겐 내 삶 속에 녹아 들어 온 따뜻함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내게 소중한 추억들을 선물해 준 당신의 공간들, 그에 대한 답례로 나는 이 매거진을 써내려가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