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태어난 지 꼭 이백일. 내일부터 나는 새로운 회사에 첫발을 내딛고, 아기는 이제 어린이집으로 등원한다. 어린이집 적응기였던 지난 주는 한 주 내내 힘에 부쳤다. 적응을 위해 어린이집에 한 시간씩 아기 혼자 머무르는 동안 나는 불안해 어린이집 근처를 서성거렸고, 아기는 하루도 빠짐없이 큰소리로 울어댔다. 거기다가 아기는 하루종일 먹은 걸 몽땅 게워내기도 하고, 이틀 내내 돌 같이 딱딱한 변을 보면서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아기는 심신이 불안정한 상태라 내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계속해서 매달렸고 그 때문에 나는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한 주를 보냈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탓에 급기야 나까지 감기에 걸려 앓아눕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감기도 감기지만, 사실 나는 늘상 불안했다. 어린이집 선생님들도 모두 좋으시고 양가 부모님들도 선뜻 도와주신다고 하셨지만 어떤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기가 잘 적응할까, 아기가 울지 않고 잘 있을 수 있을까, 부모님이 너무 힘들지 않으실까, 아기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할 때 제시간에 출근할 수 있을까 등등.. 온갖 걱정거리와 고민들이 끊이지 않고 줄줄이 새어나왔다. 금요일엔 아기가 엄마 없이도 잘 놀았다고 했고, 토요일엔 드디어 아기가 정상적인 변을 누었는데도.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초조와 불안에 계속해서 시달렸다.
너무나 불안정해하는 내가 보기 딱했는 지, 오늘은 친정엄마가 아기를 봐주신다며 교회에 다녀오라고 등을 떠밀었다. 가지 않겠다고 했는데도 엄마는 굳이굳이 바람 좀 쐬고 오라며 아기를 품에서 빼앗았다. 얼결에 문밖에 나와서 서성이다가 나는 미혼일 때 출석했던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랫만에 출석한 교회는 예전과 그대로였다. 여전히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십자가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 주보에는 세월호 사건 때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글이 실려 있었다. <금요일엔 돌아오렴>이라는 책의 한 구절인 듯 했다. 오랫만에 듣는 목사님의 목소리는 다소 무거웠다. 담담히 말을 전하는 목사님의 설교 가운데 어떤 문장들이 묵직한 진주알처럼 내 마음 속으로 데굴데굴 굴러왔다.
'우리는 비 본질적인 것에 사로잡혀 본질적인 것을 놓치고 맙니다. 주님이 주신 우리의 아름다움을 잘 닦아 하나님께 다시 바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본질입니다...'
본질. 너무나 오랫만에 듣는 단어였다. 근원과 본질, 이익을 쫓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넓게 보는 눈. 내 삶의 근원, 내 일상의 목적지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계속해서 널뛰기하던 마음이 다소 차분해졌다. 지금의 일상들은 늘 언젠간 마쳐야 하는 작은 숙제들의 연속인데, 여기에만 휩쓸려 다니다 보면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될 지도 몰랐다. 나는 이 숙제 더미에 너무 깊숙이 가라앉아 있어서, 정작 나를 휘몰고 다니는 인생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내게 일상은 매 순간 폭포 같지만 인생은 느리고 고요한 강물 같다. 여기에 대해 생각하니 아기에 대한 신뢰감도 생겨났다. 아기에게도 인생이 있고, 그 기나긴 인생 속에 이제 가게 될 어린이집은 아주 잠깐 지나쳐 가는 장소일 것이다. 아기도 언젠간 어린이집과 유치원, 학교를 거쳐 사회인이 될 것이고 지금은 그 시작일 뿐. 남들보다 일찍 시작했다는 이유로 과하게 불안해 할 필요는 없었다.
어쩌면 나는 내게 부여된 '엄마'라는 역할에 지나치게 몰입되어 있는 건지도 몰랐다. 아무도 주지 않는 죄책감을 나 스스로 덮어 씌우고, 누구도 주지 않은 선택을 나 스스로 강요하는. 나와 아기만이 존재했던 숱한 시간들, 그 일상의 궤적은 내 삶을 딱 그만큼으로만 한정지었던 것이다. 내 감정도, 생각도 그 공간을 벗어날 수 없도록 말이다.
이제 아기도 나도 이 작은 방에서 보내던 둘만의 날들을 떠나 보낸다. 아기는 내가 모르는 아기만의 시간을 갖게 되고, 나도 아기가 아닌 일에 집중하는 시간을 맞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가 서로를 놓는 건 물론 아니다. 이것이 오히려 서로의 손을 더 꽉 붙들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도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더욱 성장하고, 또 우리의 공간에서 서로를 품을 수 있는 날들을 만들어 갈 수 있기를 소망하며, 이제 드디어 내일을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