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장의 포스트잇

06. 소시지계란부침

by 갱그리

중학교 이학년 즈음인가, 학교 급식실이 보수공사를 하게 되면서 한 학기 정도 점심 도시락을 싸야 하는 때가 있었다. 한 학기 동안 점심으로 도시락을 싸가다가 이윽고 급식실 공사가 끝나고 도시락을 마지막으로 먹는 날, 함께 밥을 먹던 친구들과 다 같이 비빔밥을 해먹기로 했다. 각자 집에서 나물과 밥을 갖고 오고 한 명이 대표로 고추장과 참기름, 깨 따위를 챙겨 왔다. 점심시간은 늘 설레는 시간이었지만 그 날만큼은 더 두근두근하게 점심시간이 기다려졌다. 이윽고 4교시 마침 종이 울리자 우리는 책상을 서둘러 붙이고 준비해 온 커다란 양푼에 각자 갖고 온 나물과 밥을 모두 넣어 다섯 개의 숟가락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밥과 나물들을 비벼냈다. 비빔밥 맛은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지금까지도 그때의 기억이 마음속에 정겹게 남아 있다.


사실 중학교 시절은 지금까지도 내 인생 최고의 암흑기였다. 1학년 내내 나는 반에서 왕따였고, 2학년으로 올라갔을 때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밥 먹는 그룹은 있었어서 1학년 때처럼 내내 밥을 혼자 먹진 않았다는 게 다행인 정도였다. 1학년 때 당한 괴롭힘으로 찾아 온 우울증은 2학년 때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학교 쉬는 시간에도 하교 후에도 오로지 노트에 끼적이는 글과 만화책, 온라인 게임 정도가 내 세계의 전부였다.


그러던 와중 시작된 급식실 공사와 도시락 점심은 어두웠던 학교 생활에 전환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학교에서 힘든 시간을 겪고 있다는 걸 알았던 엄마는 점심마다 친구들에게 인기 있을 만한 반찬을 만들어주곤 했다. 계란말이며 비엔나 소시지, 치킨너겟이나 감자튀김 등 층층이 쌓인 도시락의 마지막 칸에는 늘 중학생들의 입맛을 끌리게 할 반찬으로 채워져 있었다. 모두가 같은 반찬을 먹던 급식 때는 할 수 없었던, 엄마가 정성스레 만들어 준 반찬을 친구들에게 후하게 한 젓가락 씩 나누어주며 나는 또래 아이들과 점차 대화를 터 나갔다.


그중에서도 제일 인기가 많았던 건 엄마의 소시지 계란 부침이었다. 소시지를 사선으로 잘라 계란 옷을 입혀 부쳐 낸 소시지 계란 부침은 언제 먹어도 일품이었다. 소시지 계란 부침은 뭐니 뭐니 해도 부침개만큼이나 크고 넓적하게 부쳐내는 게 최고였지만, 도시락에는 도시락통 크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작게 잘라 넣었다. 계란부침을 얇고 넓적하게 펼쳐야 하나 손재주 없는 내가 직접 할 때는 종종 스크램블 에그처럼 되어 버렸다. 하루는 남편에게 해주려고 마음 먹고 요리를 시작했는데 햄과 계란이 그저 프라이팬 위를 뒹굴고 있을 뿐인, 정체 불명의 햄 계란 볶음이 되고 말았다. 재료가 재료인지라, 그 상태로 먹어도 맛있긴 했지만 달님같이 동그란 부침개를 보여주지 못해 못내 서운했다.


IMG_0156.JPG 부추나 파를 함께 부쳐내면 더욱 맛있다:)


소시지 계란부침이 한 몫 거들었지만, 그 암흑 같던 중학교 시절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위로해주었던 건 매일 도시락통 뚜껑 위에 붙여져 있던 엄마의 포스트잇이었다. 집에 돌아가도 말없이 방문을 닫고 게임에만 열중했던 딸이었는데도 엄마는 매일같이 짤막한 편지를 써주었다. "사랑하는 예쁜 딸, 감기 기운은 좀 나아졌는지. 맛있게 먹고 오늘 하루도 힘내." 단지 포스트잇 한 장의 짧은 글이었지만 엄마의 마음만큼은 벅차게 전달되었다. 그때 그 시절 힘든 시간들을 조금씩 기운 내어 이겨낼 수 있었던 건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고, 무엇보다도 먼저 말을 할 때까지 내내 기다려주었던 엄마 덕택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 우울했던 학교 생활이 극적으로 변하지는 않았지만 점차 나아졌다. 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친구들과 부대끼어 사진도 찍었고, 졸업 이후 대학교를 마칠 때까지 몇몇 친구들과는 계속 연락을 이어갔다.


누구에게나 어렵고 힘든 시간이 있다. 그러나 그때 옆에서 든든히 손 잡아 줄 사람 한 명만 있다면 다시 아침이 올 때까지 견뎌낼 수 있지 않을까. 내겐 엄마의 포스트잇이 그랬다. 그건 지금 당장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겠지만 언젠가는 꼭 나아지리라는 희망이었고, 그 시간이 올 때까지 옆에 있어주겠다는 둘만의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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