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보면 어딘가 구석지고 적당한 곳에, 또는 우체통 위에, 또는 가로등 아래에, 그러니까 어딘지 빈 플라스틱 컵을 놓기 딱 좋은 곳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곳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누군가가, 이미 여러 번 플라스틱 컵을 버려서 컵들이 쌓여 있기 마련이다. 카페에서 테이크 아웃으로 받아 들고 나와 길을 걷다 손이 시리면, 손은 너무 시린데 음료는 다 마셨고 마땅히 버릴 만한 쓰레기통을 찾지 못했을 때, 그런 ‘적당한 곳’은 눈에 잘 들어온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먼저 플라스틱 컵을 버려둔 것을 보면 신기하게도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지며 동시에 과감해진다. 담배꽁초가 땅에 떨어진 곳을 보면 자연히 그곳이 금연구역에서 흡연구역으로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다. 순식간에 길바닥이 쓰레기통이 된다. 달큰한 음료가 끈적하게 남아 지저분한 컵들이 무수히 길에 쌓여 있다. 자기네도 추위를 탄 다는 듯이 옹기종기 모여서 말이다.
이런 게 도시 플라스틱 컵의 운명이다. 이들은 두 시간을 채 살지 못하고 길바닥에 다른 컵들과 우스운 꼴로 모여 버려지거나, 가끔 양심적인 사람의 손을 탔다면 깨끗하게 헹궈진 후 재활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플라스틱 컵이 어떠한 운명을 맞이하든 간에, 그 수가 절대적으로 많다는 점이다. 이들은 증식하는 좀비처럼 빠르게 늘어났다. 그건 당연히 일회용 컵을 많이 사용하는 카페들이 무수히 많아졌기 때문이다. 커피, 제과점은 2008년 3500개에서 2018년 3만 549개로 10배 가까이 늘었다. 전체 1회용 컵 사용량도 2007년 4억 2000개에서 지난해 28억 개로 급증했다.
도시의 28억 일회용 플라스틱 컵의 흔했던 운명은 올해, 큰 변화를 맞이할 예정이다. 14년 만에 ‘1회용 컵 보증금’ 제도가 부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올해 6월부터 매장에서 커피나 아이스크림 등 일회용 컵에 담기는 무언가를 주문할 때, 그러니까 카페에서의 거의 모든 주문에서, 일회용 컵 보증금 300원을 내야 한다. 그리고 사용한 일회용 컵을 반환하면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 보증금을 돌려받기 위해 일회용 컵을 돌려주는 곳은 꼭 원래의 지점이 아니어도 된다.
보증금제 대상 매장은 전국 매장수가 100개 이상인 사업자가 운영하는 매장이다. 그러니까, 이디야, 스타벅스, 투썸플레이스. 그리고 던킨도너츠, 파리바게뜨, 뚜레쥬르. 롯데리아, 맘스터치, 맥도날드, 버거킹. 배스킨라빈스, 설빙. 그리고 공차, 스무디킹, 쥬시다. 이디야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면서 추가로 지불한 보증금 300원을, 해당 일회용 컵을 가지고 공차로 가면 돌려주는 식이다.
사실 이 일회용 컵 보증금 제도는 처음 등장한 게 아니다. 까마득한 옛날이라고도 생각되는 14년 전, 시행되었다 ‘실패’에 그친 제도였다. 14년 만에 부활한 제도인 거다. 이전에 시행되었던 제도가 실패한 이유는 회수율이 저조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일회용 컵 보증금은 50~100원 수준이었고 회수율은 30%에 그쳤다. 그때는 제도가 업계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추진되었다. 법적 강제성이 없었기에 회수율이 낮았을 것이리라. 또한 소비자가 보증금을 찾아가지 않을 때, 남은 보조금을 업체가 자의적으로 사용하는 등 관리의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이번에 부활하는 제도는 좀 더 깐깐하게 모습을 정비했다. ‘자원순환 보증금 관리 센터’라는 것을 설립해 보증금을 직접 관리하며 미반환 보증금을 재활용 처리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1회용 컵 반납 시 부착된 바코드 확인을 통해 이중 반환을 방지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컵의 표준 규격을 지정해 서로 다른 프랜차이즈 매장에서 사용하는 컵들이 모습을 같게 하기로 했다.
이 제도를 달리 말하면, 커피값이 300원이나 올랐다. 그것도 어디에서나. 300원을 돌려받고 싶으면 움직여야 한다.
보증금을 돌려받기 위해서는 일회용 플라스틱 컵을 다시 프랜차이즈 매장에 가져가 반환하면 된다. 그건 물론 수고스러운 일이다. 불편을 감수하는 일이며 물가 인상이 우려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올해 6월부터 우리는 모두 크기가 같아진 컵들을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받아 들고 나오게 될 것이다. 300원을 더 지불할 것이고 지불함으로써 내가 들고 있는 플라스틱 컵의 존재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거리의 적당히 구석진 곳을 찾을 생각을 하기 전에 길거리에서 즐비한 프랜차이즈 매장에 눈을 돌릴 것이다. 4만에 가까운 수를 자랑하는 프랜차이즈 카페를 시야에 들이기란 너무 쉽다. 그곳에 손에 들고 있던 플라스틱 컵을 돌려준다. 그리고 300원을 받는다. (모바일 계좌이체도 가능할 것이라 한다)
투명했던 플라스틱 컵의 존재감을 300원어치 의식하고, 몸을 움직이지만, 이러한 불편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불편이 아니던가?
( 2편에서 계속 )
About Writer : blog.naver.com/815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