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불평등, 재앙』 (장호종 外) 서평)
사이비 환경단체들이 앞장서서 기후위기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도 이제는 ‘촌스러운’ 일이 됐다. 오늘날 세계 주요 선진국의 지도자들은 오히려 ‘친환경’에 우호적이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미국을 파리 기후협약에 복귀시켰을 뿐만 아니라, 2030년부터 신차의 절반을 ‘친환경’ 차량으로 만들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도 ‘유럽 그린딜’ 정책을 발표하며 ‘친환경 트렌드’에 동참했다. 대규모 재정지출과 강력한 정부의 개입으로 기후위기를 적극적으로 지연시키자는 ‘그린 뉴딜’은 각국 개혁진영의 대표적인 정책의제가 되었다. 이처럼 ‘저탄소’, ‘녹색’, ‘친환경’과 같은 단어들을 세계 여러 정부의 정책 이름에서 찾는 것이 더 이상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됐다.
자본가들 역시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소리 높여 주장한다. 빌 게이츠 같은 상징적인 거대 자본가는 ‘기후변화’야말로 ‘엄청난 경제적 기회’가 될 것이라며, 기후위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을 주문한다. 국내외 유수의 대기업들이 ‘ESG 경영’을 내세우며 ‘친환경 전환’, ‘탄소중립’과 같은 ‘녹색 구호’ 아래 환경관련 대규모 투자계획을 잇달아 발표한 것은 이런 흐름을 반영한다. ‘친환경 전기차’ 시대를 선도할 것으로 기대되는 ‘테슬라’는 지난 수년간 놀라운 성장세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기후위기는 우리가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좋은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모두가 기후위기의 심각성에 공감하고 있는데다, 정부나 다국적 대기업과 같은 강력한 행위자들이 그 해결을 위해 애쓰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국가와 자본이 어떤 ‘개혁적인’ 사회의제에 이토록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딘지 어색하다.
사실 국가와 기업은 일련의 '친환경 전환'을 새로운 '성장전략'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주도하는 ‘친환경 전환’은 일관되게 지속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개혁적인 성향의 사회민주주의 정치세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규모의 ‘산업전환’을 통해 자본주의 경제를 화석연료 기반 체제로부터 ‘탈동조화’시키는 것은 자본주의를 ‘지속가능 하도록’할 것이고, 자본가들에게 더 많은 이윤을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가져다줄 것이다. 빌 게이츠가 노골적으로 밝혔듯이, 기후위기는 이들에게 최고의 ‘기회’인 셈이다. 예컨대 ‘녹색 전략’이 충분한 이윤을 제공하지 못할 것으로 판명되면, 국가와 자본은 언제든지 태도를 바꿔 친환경 전환을 중단할 것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자본주의가 그 시작부터 화석연료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기후위기의 근본 원인은 자본주의 자체이므로, 자본주의적 이윤추구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기후위기에 상황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으로는 기후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으로 전망한다. 기후위기의 진정한 해법은 ‘사회주의’로의 ‘체제전환’이며, 그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국가나 기업이 아니라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했던 것은 18세기 말이었지만, 1820년대까지도 공장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것은 증기기관이 아니라 수력 기반의 방직기와 방적기였다. 수력이 (석탄)화력과의 경쟁에서 밀려나게 된 결정적 계기는 1820년에서 1830년 사이 ‘공장법’의 도입이었다. 그전까지는 물이 부족해지면 그만큼 노동시간을 연장해서 손실을 만회할 수 있었는데, 공장법으로 인해 노동시간이 제한되자 그 방법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기동성이 뛰어난(에너지원이 부족해지면 더 많은 석탄을 노동력을 동원해서 ‘옮겨오면’ 된다!) ‘화석연료’로의 전환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내연기관의 발명으로 '석탄'에 이어서 '석유'가 본격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등장했던 탱크, 전함, 잠수함, 전투기 등은 모두 석유가 에너지원이었고, 특히 1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자동차산업이 정점을 찍고 플라스틱 및 합성섬유가 발명되면서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산업의 규모가 폭발적으로 커졌다. 이 모든 과정은 자본주의적 경쟁 속에서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렇듯 자본주의는 ‘화석연료’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며, 기후위기는 20세기 자본주의의 직접적 결과였다.
오늘날 국가와 자본은,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화석연료만 재생에너지로 대체하거나,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면 환경파괴를 상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이윤추구가 지상의 목적인 자본주의는 자연환경을 단순한 착취의 대상 내지 핵폐기물, 온실가스, 폐수의 폐기장으로 인식하기 때문에i 이는 순진한 생각일 뿐이다. 실제로 최근 각국 정부가 제시하는 기후위기 대응책은 불철저하거나 일관적이지 않고, 심지어 기만적이다. 생태사회주의자인 존 벨라미 포스터는 마르크스의 역사관이 내포하고 있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생태적’ 사유를 상기시키며 자본주의 극복과 기후위기 극복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고 주장한다. 즉, 비-자본주의적(사회주의적) 인식으로의 전환 없는 ‘친환경’은 사상누각일 뿐이다.
노동자들이 환경을 위해 싸웠을 때
'환경문제'에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자 할 때 정말 중요한 것은 '관점'이다. 기후위기가 심각하다는 여러가지 과학적 사실관계를 반복해서 학습하고, ‘지구를 지키자’는 식의 생태주의 구호에 감성적으로 동조하는 것 이상의 ‘실천’을 위해선 ‘진정한 대안’이 무엇인지에 대한 청사진이 있어야 한다. 그 길은 ‘탈성장’도, ‘그린 뉴딜’도 아닌,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 변혁이다.
이 책이 제시하는 것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을 취하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은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온당하게 평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환경문제에 대한 국가와 자본의 대응(그린 뉴딜과 ESG 경영)이 과도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에 비해, 평범한 노동자들의 환경’운동’은 그 중요성과 의의가 충분히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 계급이야말로 환경오염과 기후위기로 인한 피해의 가장 큰 당사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특히 국가와 자본이 주도하는 ‘탈-탄소’로의 산업전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대규모 고용관계 청산의 최대 이해관계자인 노동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기후위기에 직접 대응하는 것은 보다 민주적이고 근본적인 ‘녹색 대안’이라는 점에서 주목에 값 한다.
2018년 마크롱 대통령의 유류세 인상에 맞선 프랑스의 '노란 조끼 운동'은 운동 간 분열을 조장하는 정부의 시도에 맞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환경운동과 어떻게 공동전선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교훈을 남겼다. 당시 마크롱 정부는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을 이유로 유류세 인상을 시도했고, 직접적인 타격을 받은 운수노동자들과 승용차로 출퇴근하는 청년노동자들은 ‘노란조끼’(“프랑스에서 자동차 운전자는 의무적으로 형광 노란 조끼를 차량에 구비해 놓아야 한다”ii)를 입고 도로봉쇄 시위에 나섰다. 정부는 이를 기후위기 대응에 반대하는 반동적인 시위로 매도했지만, 노란 조끼 활동가들은 프랑스의 ‘기후 행진’에 동참하면서 정부의 ‘갈라치기’를 무력화시켰다. 노동운동이 환경운동과 광범한 연대iii를 형성한 결과 프랑스 노동자들은 마크롱 정부의 유류세 인상과 연금개악을 지연시키는데 성공했다.
여전히 많은 노동자들이 화석연료 기업에 종사고 있다는 사실은 자칫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의 분열을 야기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지금과 같이 국가와 자본이 주도하는 일방적인 ‘산업전환’은 사회운동을 분열시키고, 자본주의의 폐해를 고스란히 반복하게 될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후위기 대응은 ‘노동자에 의한 생산활동의 민주적 통제’라는 사회주의적 비전을 참고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1970년대 영국의 ‘루카스 플랜’과 호주의 ‘그린 밴 운동’, ‘우라늄 채굴 반대 운동’ 등과 같이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성공적 제휴 사례들을 떠올린다면 불가능한 일이 결코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전세계의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가장 광범위한 연대를 구성하는데 성공한 ‘멸종반란 운동’이 노동계급과 어느 정도 수준으로 제휴할 수 있을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i 장호종 외, 『기후위기, 불평등, 재앙』, p.511
ii Ibid p.336
iii Ibid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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