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 여사
나랑 세 살 차이인 곽 여사는
나의 둘째 고모의 따님 되시겠다.
애기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친자매처럼 붙어살았다.
내가 여섯 살 무렵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ㅡ 언니! 내가 아홉 살 되면 ‘야’라고 해도 돼?
(그때는 나만 나이를 먹는다고 생각했었다.ㅋㅋㅋ)
곽 여사는 나의 유년기를 넘어 지금까지 많은 페이지를 차지한 사람이다. 내가 민들레 홀씨처럼 정처 없이 떠돌 때 나를 꽉 붙잡아 준 단단한 땅 같은 사람이었다. 곽 여사에게 나는 걱정 반 애정 반으로 늘 눈길이 가는 철부지였을 것이다.
서울로 유학 간 곽 여사를 만나러 강원도에서 버스를 타고 종종 찾아가곤 했다. 한 번은 눈이 많이 내려 서울까지 장장 14시간 정도가 걸렸던 날이 있었는데 핸드폰도 없던 날 기다리느라 곽 여사는 추운 겨울날 밖에서 그 긴 시간을 하염없이 서 있었다. 그렇게 기다려 준 언니를 보자마자 난 화장실도 못 갔다며 철 없이 투덜거렸다.
고작 세 살 위였지만 나보다는 한참 어른 같았고 항상 부족한 용돈을 털어 신촌이며 롯데월드며 큰 도시 구경을 시켜주던 언니였다.
그 시절 곽 여사는 성산동의 작은 집에서 풍족하지 않게 살았지만 마음만큼은 부자였다. 한 번은 신촌에서 당시 유행하던 프라다 백팩(물론 짝퉁)을 사줬는데 방학이 끝나고 시골 학교에서 메고 갔더니 친구들의 부러움이 쏟아졌다. 그날 내 어깨는 하늘까지 솟아 있었다.
시간이 흘러 곽 여사가 대학생이 되어 살던 자취방에서 함께 살게 됐다.
한동안 나는 피시방 알바를 하고 곽 여사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웃음이 끊이지 않는 날을 보냈다. 그러다 취직을 하게 돼 멀리 떠났고 우리는 몇 년간 떨어져 지냈다.
취직한 그 공장에서 제품 검수를 맡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이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밝은 빛 속에서 일하다 내 눈은 망가졌고 더는 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됐다.
(지금 생각하면 산재 수준이었지만 그땐 ‘산재’라는 단어조차 몰랐다.)
마침 던킨도너츠에서 점장을 하던 곽 여사가 나를 불렀고 또다시 우리는 함께하게 됐다. 매사가 꼼꼼하고 야무진 곽 여사와는 반대로 나는 덜렁대서 자주 혼났고 기대에 부응하려다 계속 실수를 해 언니 혈압을 오르게 했다. 그래도 보호자가 있으니 타지 생활이 든든했고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지켜보며 성인의 삶을 견뎌냈다.
열심히 일만 하던 곽 여사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 키가 아주 컸는데 사람들마다 잘 생겼다고 칭찬해서 나는 의아했다. 왠지 소박하고 단정한 느낌이었고 아담한 언니와 참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차분하게 연애를 이어갔다. 우리 매장에도 종종 찾아와 언니의 일을 돕고 우리에게 밥도 사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평소 건강한 체질이라 감기도 잘 걸리지 않던 곽 여사가 배가 자주 아프다고 했다.
며칠 뒤 곽 여사는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하는 거야.”
그 말을 듣자마자 알았다.
곽 여사, 임신이었다!!!
곽 여사는 언니에서 엄마가 되었고
소박하고 단정하던 언니의 남친은 나의 형부가 되었다.
몇 달 뒤, 곽 여사의 첫아들 유겸이가 태어났다.
출산 후에 조리원으로 유겸이를 보러 갔는데 너무 작아서 무서운 마음에 제대로 만지지도 못했던 게 기억이 난다.
그 후 2년 뒤, 둘째 민채가 태어났다.
곽 여사를 쏙 빼닮은 민채에게 나는 유난히 정이 갔다. 둘째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형부는 일을 배우기 위해 독일로 떠났다. 아직 어린아이들을 두고 멀리 떠나는 형부 마음도 참 힘들었겠지만 아이 둘과 집에 홀로 남은 곽 여사는 얼마나 막막했을지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늘 우직하던 곽 여사도 그때를 회상하면서 나에게
‘아마 그때 잠깐 산후 우울증이었던 것 같아’
라고 했다.
그즈음 곽 여사가 같이 살자고 했다.
난 또다시 언니와 함께 하게 되었다. 딱 하나 있는 방을 내어준 곽 여사와 형부에게 정말 고마웠고 나도 그때부터는 성실한 동생과 처제로 살기로 다짐했었다. 아침에는 학원을 다니고 저녁에는 집 앞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마감할 때 남은 빵은 우리 조카들의 간식이 되었다. 그 무렵 내 카카오스토리에는 아이들 사진으로 도배가 되었다.
가족의 따뜻함을 배우면서 곽 여사에게 혼나기도 하고 기대기도 하고 조카들과 함께 자라던 시기였던 것 같다.
난 언니에게 쥐꼬리만큼도 안 될 돈을 생활비 명목이라며 주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염치가 너무 없었다.
후에 결혼하고 내 손으로 직접 장을 보고 빨래며 청소며 밥이며 살림을 해보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언니에게 배려받고 살았는지 그제야 깨달았던 것 같다. 역지사지라고, 역시 사람은 지가 직접 겪어봐야 안다.
그 무렵, 베프 히동이의 소개로 나도 남친이 생겼다. 수더분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가족들이 모두 마음에 들어 했는데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는 "귀한 외아들 가난한 집에 장가 오게 해서 미안하다"고, 아빠는 사위에게 하염없이 고맙다고 했다. (.... 왠지 모르게 어이가 없었다. -_-;)
그렇게 내가 결혼을 하게 되었고
곽 여사는 나를 분가시켰다.
아직도 곽 여사와 나는 서로의 심리상담소를 자처하고 있다. 특히 우리는 팔이 영구적으로 굽은 성향이라서, 아주 편파적인 데다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면서 무조건적인 편을 들어주고, 그 대상의 욕을 신나게 해 준다.
나는 말투부터가 짹짹거리고 쪼잔한 데다가 가까운 사람에겐 짜증을 쉽게 내는 성격이라 곽 여사에게 서운하게 한 적도 많았을 테고, 그렇다고 크게 뭘 해주지도 못했다. 그런 나도 힘든 시기마다 도움을 받고 먼 길에서 헤매지 않을 수 있었던 건 항상 곽 여사 같은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복으로 따지면 인복이 타고난 팔자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교만 떨면 안 되지만, 난 그리 생각해 본다.
가끔 운이 좋은 사람들을 두고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고 하던데 나 정도의 복이라면 아마 전생에 나라까진 아니어도 여뎃명 정도는 구하지 않았을까 싶다.
오늘 글을 쓰기 전엔 그냥 곽 여사 얘기나 해볼까 하고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했는데 막상 글을 마칠 때 즈음 되니 지나간 세월들이 생각나면서 언니에게 고마움도 크지만 미안한 마음이 많이 생긴다.
엄마가 안 계신 나에게 곽 여사는 여전히 엄마 같은 언니다. 아직도 나에게 용돈을 보내주고, 때마다 고춧가루며 온갖 걸 보따리로 챙겨준다. 결정하기 어려운 큰 문제는 늘 곽 여사에게 먼저 물어보고 언니는 항상 현명하고 지혜로운 좋은 답을 내려준다.
곽 여사는 현재 착하고 건강하게 잘 자란 삼 남매와 언제나 성실한 형부, 그리고 막둥이 강아지 꿀이 까지 ㅡ 이렇게 여섯 식구가 오손도손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그 행복한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나의 가장 귀한 사람 중 하나인 곽 여사에게 더 잘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항상 나의 곁에서 100살이 넘도록 건강하고 행복하게 나의 언니로 살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언니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날이 오도록 노력해야겠다.
아! 그리고 사진 속, 앞에 있는 어린이가 곽 여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