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교 시절, 웃픈 단편 기억들

by 아세빌

분교 시절, 웃픈 단편 기억들

강원도 오색의 아주 작은 분교.


작은 산 사이에 지어진 이곳은 아침이면 운동장 위로 안개가 내려앉았고 작은 교실 창문은 습기로 뿌옇게 흐려졌다. 전교생이 고작 몇십 정도 되는 곳이라 운동회 날에는 동네잔치가 열리는 날이었고 모두가 서로를 아는 그런 곳이었다.


그곳이 내 세상의 전부였다.



내 기억 속의 우리 학년은 고작 4명이었다.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는 이제 헷갈린다. 1학년이 네 명이었는지, 아니면 2학년이었는지.

분명한 건 교실 안에 앉아 있는 아이들이 고작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는 사실이었다.


우리 교실엔 유일한 머스마가 있었는데 그 애는 틈만 나면 나를 괴롭히면서 깔깔거렸다.

고작 3명 중에 타깃이 나라니 얼마나 억울한지.


집에 와서 맨날 엄마에게 일러봤자 ‘하지 말라’고 하라던지, 맞서 싸우라던지 하는 피드백만 줬는데 하필 나는 싸울 줄도 모르는 데다가 소심해가지고 뻑하면 우는 애였으니 고스란히 괴롭힘을 당하면서 학교 생활이 힘들어져만 갔다.


어느 날엔가 지켜만 보던 아빠가 등굣길에 쫓아와 그 애를 붙잡고 으름장을 놓았는데 며칠간은 편안하더니 금세 또 괴롭혔다. 지금 생각하면 용준이는 나를 좋아했던 게 아닌가 하면서 혼자 아름답게 포장해 아련한 추억에 젖어본다. ㅋㅋㅋ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티며 학교에 다녔는데 작은 학교에는 또 다른 공포의 장소가 있었다.


시골 학교에 걸맞게 화장실은 푸세식이었다.

학교 뒤편에 좀 떨어져 있었는데 그곳은 어린 나에겐 공포의 장소였다. 어두컴컴하기도 하고 가뜩이나 다리 짧은 내가 쓰기엔 턱도 없이 버거운 공간이었는데 결국 사고는 터지고야 말았다.


내 다리가 그곳에 풍덩 빠지게 된 것이었다. ㅋㅋㅋㅋㅋ


비명과 동시에 울음이 터졌고 함께 화장실을 갔던 친구는 선생님을 부르러 달려 나갔다.

잠시 후 난 팬티만 입힌 채 홀딱 벗겨져 학교 수돗가에서 씻기고 있었고 친구들은 문 앞에 몰려와 나를 구경했다. 아무리 애기어도 부끄러움, 서러움, 창피함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는 눈물범벅이었고 친구들은 킥킥거리며 구경했다.

지금 같으면 가시내를 홀딱 벗겨서 씻겼다고 고발당하고 뉴스에라도 나올 사건이었지만 그땐 그냥 시골 분교의 흔한 하루였다.


울고 웃는 일은 끊이질 않았다.

작은 학교에도 ‘급식’이라는 새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작은 학교이니 급식소를 새로 짓는 건 사치였을 테고 학교 뒤의 어떤 가정집에서 급식을 하게끔 되었다.


하루는 엄마가 챙겨주신 급식비 봉투를 선생님께 내밀었는데

“오늘 말고 며칠 뒤에 가져오너라.” 하시는 선생님 말씀에 그 봉투는 다시 내 주머니로 들어갔다.


나는 그 봉투를 가지고 쌈짓돈인 양 학교 앞 조그만 슈퍼로 달려가 그 당시 가장 비쌌던 장미그림이 그려진 초콜릿을 한 아름 사서 마주치는 학생들마다 나누어 주었다.

친구들이 입안 가득 달콤함을 느끼며 웃는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세상 제일 뿌듯한 아이가 됐다.


하교하고 집에 온 나는 엄마에게 자랑스럽게 떠들었고 역시나 두들겨 맞았다. 장사를 마치고 집에 온 아빠도 엄마에게 사건을 듣고는 뒷마당에서 회초리를 갖고 들어왔다. 말 그대로 죽도록 혼난 날이었다.


고작 여덟 살짜리가 그렇게 혼이 나고도 억울한 마음이 들긴 했나 보다. 저녁도 안 먹고 홀로 나와 앞마당에 있는 의자에 앉아 밤하늘을 바라보며 엄마 아빠를 어떻게 하면 속상하게 할지 고민을 했는데 이따가 가방을 싸서 집을 나가 엄마 아빠를 슬프게 해야겠다는 못된 맘을 먹고 있었다.


근데 하도 울어서 배는 고프지, 주변은 산 밖에 없으니 갈 데는 없지. 하염없이 밤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잠시 후 아빠가 데리러 나와 나를 안고 집으로 들어갔다. 배가 많이 고프던 나는 못 이기는 척 저녁을 먹었고 그날 먹은 엄마의 김치찌개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맛이 생생하다.


그렇게 혼나고 달래고, 사랑을 먹으며 울고 웃는 날들이 이어졌다.

토요일은 조금 특별했는데 선생님이 우리 학년 네 명을 데리고 동네지도를 그리러 다니셨다.


연필로 삐뚤빼뚤 길을 긋고 논밭과 산의 모양, 작은 냇가를 그려 넣는 시간이 내겐 작은 탐험 같았다.

토요일의 점심은 학생들의 집을 돌아가며 먹었는데 우리 집 순서가 되자 엄마는 큰 상을 정성껏 차려내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큼직한 오징어순대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지금은 그 음식이 손이 얼마나 많이 가는지 알게 되니, 엄마가 나에게 얼마나 지극정성이셨는지 더 또렷하게 느껴진다. 우리 엄마는 쑥스러움이 많아 딸 앞에서 노래 한 소절도 못 부르던 분이었는데, 그런 엄마가 오징어순대 한 접시에 마음을 다 쏟아내셨던 거다.


엄마는 늘 조용한 방식으로 나를 지켜주셨는데 가끔은 극적인 때도 있었다.


억울하게 도둑 누명을 쓴 날이었다.

한 친구가 자기 색연필을 내가 훔쳐갔다며 선생님에게 일러바쳤는데 안 훔친 걸 증명할 길이 없어 억울한 마음에 울면서 집에 돌아왔다.

딸이 울면서 오니 놀란 엄마는 사연을 듣자마자 한 손에 연탄집게를 들고 그대로 집을 뛰쳐나갔다.

다음 날 나를 도둑으로 몰았던 아이는 내 앞에서 사과했고 심지어 색연필까지 선물로 건넸다.

엄마가 연탄집게를 들고 어디까지 갔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그렇게 많은 추억과 사랑을 먹고 자라던 나는

3학년이 되어 산골을 떠나 전학을 갔다.

이사를 간 아파트에서 본 엘리베이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기대지 마시오.”


나는 그 뒤로 한동안은 늘 중앙에 똑바로 서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ㅋㅋㅋㅋ


산골 소녀의 분교 시절은 그렇게 내 안에서 끝나고,

또 다른 세계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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