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치없는 아이
1996년 즈음 갑자기 집이 어려워졌다.
아니 그전부터 서서히 다가온 거겠지만
용돈이 완전히 끊긴 건 그즈음이었다.
커피를 담던 작은 유리병 속에
꼼꼼히 모아둔 동전까지 바닥난 날
어린 가슴에도 막막함이 밀려왔다.
그 감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시골에서 자란 딸내미였지만
나름 사랑을 많이 받으며 컸다.
그래서였을까.
눈치도 없고 받는 데만 익숙했던
철부지 중의 철부지 열 살짜리 꼬마였다.
하굣길, 친구들이 군것질을 할 때면
나는 늘 그 옆에 붙어 서 있었다.
뺏어 먹기도 하고 사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그땐 그게 창피한 행동인 줄도 몰랐다.
그냥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ㅡ 넌 참 염치가 없다.
난생처음 듣는 말이었다.
‘염치’라는 단어가 뺨을 때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뭔지는 몰랐지만
그 말 이후로 나는 내 행동 하나하나가 부끄러워졌다.
그때부터 나는 뭔가 요구하는 게 어려워진 아이가 되었다.
늘 괜찮다고 답하는 그런 아이.
그 버릇은 성인이 되어서도 고쳐지질 않았고
도움이 필요할 때에도 도와 달라 말할 줄 모르는
그저 ‘괜찮아’만 반복하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무언가를 참는 데 익숙하고
웬만한 일엔 흔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던 것 같다.
어느덧 서른이 지나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강한 사람처럼 비치고 있었다.
이렇게 살다 보니
정작 기대고 싶은 순간엔
기댈 수 있는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누군가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먼저 알아봐 주길 기다리다
성에 안 차면 화를 내곤 했다.
겉은 강하게 잘 자란 어른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아직도 내면은 염치없는 아이였던 나는
조금씩 연습을 하고 있다.
괜찮지 않다고,
도와 달라고,
요즘의 나는 누군가에게 기대는 연습을 하고 있다.
오늘도
하루 종일 바쁘게 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ㅡ 나 오늘 진짜 너무 힘들었어. 하며
설거지며 빨래정리며 이것저것 부탁한다.
예전 같았으면
혼자 다 해놓고도
굳은 표정으로 괜찮다고만 반복했겠지.
이제는
그 염치없던 그 아이를
누군가 먼저 알아봐 주기만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다가가
ㅡ 기댈 테니 어깨를 조금 내어줘
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