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기만 하던 내가, 살아가려는 나로 바뀌기까지
한 생명을 책임진다는 일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아이의 탄생부터 온전히 맡겨지는 육아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일이었다.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힘든 시간이었고, 어떠한 상상도 지식도 주변의 조언도 예방주사가 되어주지 못했다. 아이의 작은 일탈에도 마음이 따갑고, 사소한 일이 생기기만 해도 다 내 탓 같은 죄책감이 가슴 깊이 내려앉았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장애 진단을 받기까지 내 마음은 더 깊은 무기력 속으로 가라앉았다. 갑자기 세상이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분한 마음,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는 감정들 앞에서 무너져 내리기도 했다. 평범하게 산다는 일이 제일 어렵다는 사실을 세 쌍둥이(아들만 셋)를 키우며 비로소 깨달았다.
젊었던 시절, 나는 무엇이든 혼자 해내던 사람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일이든 해결했고, 내 통제 아래 움직이는 삶이 익숙했다. 하지만 세 아이가 들어오는 순간 그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의지할 곳 없는 환경 속에서도 독하게, 억척스럽게 버티며 무엇이든 해내던 나였지만, 생명을 지키고 아이의 세상을 지켜내는 일은 지금까지 해온 어떤 일보다 어렵고 벅찼다. 내 뜻대로 자라주지 않는 아이들을 보며 점점 무력해졌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아이들은 어느새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 있었다.
인생의 평범하지 못한 자리에 서야 했고, 사람들의 시선과 눈총을 피할 수 없는 순간들도 많았다. 수많은 원망과 희망이 뒤섞인 마음을 붙잡은 채 ‘나는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라는 질문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결심했다. 평범함은 바깥이 아니라 ‘내 안에서 찾는 것’이라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내 안에 다시 평범함을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이 순간도 나는 행복할 때도 있고, 너무나 불행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인생이란 것이 바로 그런 것 아닐까. 누구나 저마다의 이유로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중증 장애 판정을 받은 아이를 키운다고 해서 그 아이가 불행하거나 그 부모가 불행하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평범한 육아보다 훨씬 많은 인내와 감정 노동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아이가 주는 순수하고 투명한 행복은 평범함의 기준을 가볍게 뛰어넘을 만큼 깊고 넓다.
나는 세 아이가 자랑스럽다. 때 묻지 않은 마음을 가진 아이들이기에, 언젠가 세상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해내고, 그 안에서 보람을 찾을 것이다. 내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가지 않은 길을 걷게 되었지만, 그 길 위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나와 함께 걷고 있었다.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하고, 같은 무게를 버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작은 이정표가 되고 싶었다. 어둠 속에서 절망에 잠긴 누군가가 조금 더 빨리 희망의 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도록 내 글이, 내 경험이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지금도 행복과 불행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며 살아가지만, 예전과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 나는 이제 끝에 꼭 ‘희망 쪽’에 서려한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생각을 조금씩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는 것.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려 한다.
견디는 것이 아니라, 견뎌낼 수 있다 믿는다.
오늘도 나는 내 삶의 주체로 서 있다.
평범하지 않아도 불행하지 않다.
오늘도 나는 나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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