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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Sep 03. 2020

오늘을 참으면 내일을 살 수 있다

여덟 번째 소란

왜 싸우지 않느냐고 묻지 말고, 어째서 싸울 수 없는지를 들여다보자.


글쓴이. 딸기크림치즈타르트




 돈이 없다는 것은 선택권이 없다는 말과 동일하다.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돈을 벌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때로 불법적인 일을 모른 척 눈 감게 하고 부당한 일을 참고 넘어가게 한다. 정당한 값을 지불받기 위해 몇 달을 수입 없이 지내기에는, 지금 내 주머니 사정이 너무나 갈급하기 때문이다. 원래 받아야 할 30만 원을 요구했다가 다음 달에 바로 해고가 되는 것보다 20만 원을 받아도 계속해서 이 일을 유지하면서 정기적인 수입이 들어오는 것이 중요하다. 이 사회에서 돈이 없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학원 보조, 교재 작성, 식당 서빙, 과외, 원고 작성 등 여러 가지 알바를 해왔다. 남들이 보기에 과외는 적은 시간에 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 최고의 ‘꿀알바’ 중 하나일 것이다. 나도 대학에 합격한 이후 과외 알바를 꿈꾸었다. 하지만 실제로 뛰어든 알바 시장은 상상과는 아주 달랐다. 그곳에서는 노동력이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고 언제나 과외 선생의 가치가 실제 보다 후려쳐졌다. 선생이 대학생이고, 과외를 맡기는 사람이 지인일 경우는 더욱 그랬다.




 “00만 원 정도 괜찮지?” 과외를 할 때마다 들어왔던 말이다. 저 물음은 정말로 나의 의사를 묻는 말이 아니다. 친분이 있으니까 이 정도 금액에도 과외를 해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암묵적인 강권이다. 두 번 정도 지인을 통한 과외를 해보았다. 한 번은 동생 친구 어머니의 부탁으로 한 국어 과외였고, 한 번은 아는 선생님을 통해서 한 수학과 영어 과외였다. 동생 친구 어머니는 주 1회 2시간 국어 과외의 대가로 월 12만 원을 제시했다. 8시간에 12만 원. 분명 당시의 최저시급보다 높은 돈이다. 하지만 단순히 과외를 하는 시간만을 계산해서 따지면 안 된다. 수업을 준비하는 시간과 교재를 고르는 시간이 따로 걸린다. 또 단순히 문제를 읽고 답을 알려주면 끝이 아니다. 답이 나오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혼자서도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도록 학습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 생각보다 고강도의 노동이며 동시에 대놓고 앞에서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아이를 참아야 하는 감정노동이기도 하다. 


 그런데 12만 원.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부터 부당한 가격 책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여기서 내가 더 높은 가격을 부르면 엄마가 곤란해지니까. 두 번째 과외도 마찬가지였다. 주 1회 2시간에서 2시간 30분 정도 영어와 수학을 하는데, 받는 가격은 아무리 봐도 말이 안 되는 가격이었다. 하지만 그때도 나는 ‘괜찮다’고만 했다. 친한 선생님의 부탁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고, 돈이 급했으니까. 노동력에 비해 헐값인 돈이지만, 당장 한 끼의 밥을 위해서 그 정도는 눈감고 넘어갈 수 있었다. 


 나에게 ‘왜 거기서 더 높은 가격을 부르거나 거부하지 않았느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친분이 있는 사람의 부탁을 거절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특히나 과외 시장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엄마 친구의 부탁이라서, 엄마와 친한 학부모의 부탁이라서, 지인이라서.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붙이면서 친분을 명목으로 노동력의 가치를 깎아내린다. 정당한 권리가 ‘정’ 앞에서는 무리한 요구와 욕심이 되어버리고 만다. ‘우리 사이에 이 정도도 못 해주느냐’는 말을 들으면 도무지 할 말이 없다. 아무리 내가 논리적으로 권리를 주장해도, 논리로 맞서지 않고 감정에 호소하며 대가 지불을 거부하는 사람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옆에서는 과외를 주선한 엄마가 ‘아는 사람인데 싸게 해주라’고 부추긴다. 이런 상황에서 돈마저 없다면 거절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당시의 내 한 달 용돈은 교통비를 내고 나면 이틀에 한 번 밥을 먹거나 매일 학교 근처에서 가장 싼 컵밥 가게만 가야 하는 정도였으니까. 다음 주의 밥 한 끼를 위해서, 교통비를 위해서. 수많은 이유들이 시야에서 부당한 대우를 차단하고 나면, 남는 것은 돈이 쥐어지는 감촉뿐이다. 귀를 막고 눈을 감으면 다음 달을 살아낼 수 있다.


 어플에서 과외를 구하려고도 해봤다. 당시에는 과외 주선 어플들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었는데 나도 성별과 닉네임을 등록하고 가까운 지역의 과외를 찾았다. 닉네임은 ‘초밥’이었다. 한 남자 학생이 본인이 재수생이라며 과외 문의를 했는데, 처음에는 과외 얘기를 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초밥 좋아하시나 봐요. 저도 좋아해요’라고 말했다. 이게 무슨 의도일까, 생각하다가 나도 좋아한다고 답했다. 이후 자꾸 이런저런 딴소리로만 흐르는 것이 영 이상해서 대화를 더 이어가지 않아 과외는 성사되지 않았다. 더 말을 이어갔으면 일이 잘 풀렸을 수도 있지만,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과외가 아닌 다른 의도에 반응해주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에게 나는 과외선생 후보가 아니라 심심풀이로 말을 걸 ‘여자’로 보였을 것이다.


 부당한 대우에도 참고 일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것이 부당하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다. 다만 내일 나의 밥을 위해서, 통학을 위해서 참아야 할 뿐이다. 돈이 없고 그래서 선택권이 없다는 건 그런 것이다. 왜 싸우지 않느냐고 묻지 말고, 어째서 싸울 수 없는지를 들여다보자. 그 안에는 단순히 ‘싸워라’ ‘거절해라’라는 몇 마디 말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지독하고 복잡한 생활 세계가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한 사람이 처절하게 싸우면서 또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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