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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Sep 02. 2020

그래도 우리는 노동자

세 번째 소란

우리의 노동이 가난과 부유함의 격차 안에서만 존재하지 않도록.


글쓴이. 해방



 나는 휴학 중인 대학생이다. 시간은 많지만 돈은 없는 휴학생. 저축해둔 돈도 없고, 정기 수입이라고는 아빠가 주는 소액의 용돈 뿐이며, 과외나 정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지도 않다. 동시에 손은 크고 인심은 넘쳐나서 친구들의 생일을 특별하게 축하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성격을 가졌다. 나가는 것은 많은데 들어오는 것은 적다. 그렇다. 아주 난감한 상황이다. 계속 이런 상황에 놓여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내게는 지속해야 할 관계와 예정되어 있는 만남이 있었다. 나는 돈이 필요했다. '8만원 익일지급'이라는 말에 이끌려 물류센터 알바를 두어번 했다. 당일배송 서비스를 제공하는 온라인 쇼핑몰을 불매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 것도 같은 시점이다. 물류센터는 적은 돈을 주고서는 엄청난 업무량을 요구하는, 그야말로 노동착취의 산실이었다. 다시는 가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나는 다시 실업자가 되었다. 사실 일용직이기 때문에 따져보면 실업자도 아니긴 했다. 나는 그냥 계속 백수였을 뿐이다. 아무튼 없는 살림에 골골대는 내게 친구가 좋은 알바자리를 소개해 줬다. 그것은 바로 어린이를 돌봐 주거나 어린이의 공부를 봐 주는 시터 알바 어플 자**였다. 앞서 말한 우연한 기회가 이것이다. 자**를 만나고 나서 나는 내가 어린이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가난과 부유함의 격차가 생각보다 더 크다는 것, 그리고 그 격차가 우리네 삶의 아주 근본적인 부분까지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았다.


 자**는 부모와 선생님을 연결해 주는 중개어플이다. 부모는 구인 글을 올리고 선생님은 구인 글을 읽는다. 일정, 거리, 내용이 마음에 들면 선생님으로 지원을 한다. 그럼 부모는 지원자들 중 한 사람을 택한다. 급여 정산은 다음과 같다. 예컨대 부모가 3만 2천원을 내면 선생님에게는 2만 4천원이 간다. 8천원은 자**가 수수료 명목으로 가져 간다. 자기의 일정에 맞추어 일을 구할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선생님 지원자는 대학생이다. 누가 베이비시터의 전형을 중년 여성으로 그리는가? 요즘은 어린이와 말이 통하는,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젊은 부모의 요구를 즉각 수용하는 젊은 선생님이 대세다. 바로 우리가 기존의 중년 여성들이 포진해 있던 노동의 장을 빼앗아 왔다. 이 덕분에 보육노동직군은 더 쉽게 비정규직이 되었다. 대학생들에게는 단기 노동도 나쁜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동이 싫은 노동자와 현대적인 자본가의 상부상조가 낳은 노동탄압이다. 


 자, 그럼 노동의 대상을 살펴 보자. 선생님이 돌봐야 하는 어린이는 3세부터 13세다. 하지만 올라오는 공고의 대부분은 6세~9세다. 부모가 100% 케어하지 않아도 되지만, 100% 방치할 수도 없는 나이다. 그래서 부모는 보호자라는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보장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이의 역량을 증진시켜 주기도 하는 자**를 선택한다. '인증된' 젊은 선생님이 온다. 비싼 가격을 감수할 만한 선택이다. 사실은 자**를 이용하는 부모들에게 그 정도 돈은 그다지 부담스럽지도 않다. 부모의 시간은 선생님의 시간보다 비싸기 때문이다. 그렇게 값싼 선생님의 시간을 산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는 어린이의 울타리와 선생님이 된다. 아동보육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없지만 돌봄노동과 교육을 병행한다. 이것이 시급 1만원의 기적이다.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나는 어린이와 잘 맞았다. 아, 물론 잘 맞아야만 했다. 나는 돈이 필요한데, 어린이와 잘 맞지 않는 사람은 이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유치한 이야기를 곧잘 하는 나는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어른이었다. 나는 과장을 잘 했으며 어린이에게 무한한 칭찬을 퍼부어 줄 줄 알았다. 어린이들은 이런 나를 좋아했다. 나도 그런 어린이들이 좋았다. 처음에는 돈을 벌기 위해 간 각 가정에서 나는 '어린이'들을 만났다.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줄만 알았던 존재들이 사실은 제각각의 시간을 살고 있다는 사실, 어린이의 머리 속에도 자기만의 세상이 있다는 사실, 어린이들의 모든 말이 나름의 철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린이를 만나는 시간은 처음에는 일이었으나 곧 재미가 되었으며 이제는 내 세상을 구성하는 하나의 중요한 꼭지가 됐다. 가정 밖에서 하는 돌봄노동은 생각보다 재밌기도 했다. 


 하지만 불안했다. 언제까지 노동을 지속할 수 있을지 예측할 수 없었다. 나는 비정규직이었다. 일의 재미와 강도를 떠나 나는 어린이가 혹여나 다치지는 않을까 항상 노심초사했다. 어린이가 다치면 다시는 시터 활동을 할 수 없을 거라는 불안이 있었다. 물론 어린이의 치료비나 합의금 같은 것을 오롯이 내가 부담해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다. 자**는 선생님과 어린이 사이에 발생한 사고에 관여한다고 했다.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고, 혹시라도 선생님의 과실로 인해 어린이가 다쳤을 때 어린이의 치료비 등을 자** 측에서 지불해 준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것은 계약서에 명시된 사항이 아니었다. 자**는 아직 상해보험 같은 것에도 가입돼있지 않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어린이가 정말 크게 다친다면, 나의 상황 설명이 변명으로 간주되는 상황이 온다면, 자**는 내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자**와 내가 체결한 계약은 근로계약이 아니라 수업 위탁 계약이다. 나는 자**에 소속된 노동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는 특수고용노동자라고 한다. 뭐, 자**는 나름대로 선생님을 잘 챙겨 준다. 자체 OT에서 선생님의 권리를 이야기해주고, 가정에서 폭력이나 부당한 처우를 받았을 때 어떻게 대항할 수 있는지 알려 준다. 게다가 사소한 일에는 자**가 직접 개입하기 때문에 선생님들은 귀찮은 일에 신경쓸 필요가 없다. 사실 대한민국 기업 전반에 비추어 살펴 보면 자**는 아주 괜찮은 회사다. 회사라고 표현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 입장에서 아주 나쁘지는 않다. 


 그런데 과연 노동자로서 내 권리는 잘 지켜지고 있는가? 돈을 많이 벌고 몸이 편한 것과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보장받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이 명제를 기억해야 한다. 계약서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나는 노동자다. 노동자로서 근로계약법으로 보호받을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나를 동등한 사업의 주체(개인사업자)로 두는 위탁계약은 그 자체로 부당하다. 나는 노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촌스러운 노동자 말고 세련된 개인사업자나 선생님, 사장님이라는 이름이 더 끌리는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노동자다. 


 노동자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에 겪는 문제는 다양하다. 자** 매커니즘에 따르면, 부모에게 '선택'받지 못하면 나는 노동을 할 수 없다. 일자리가 주어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일을 할 수 있는 노동자라니, 그야말로 엉망이다. 좋은 말로는 '남는 시간에 할 수 있는 알바'지만, 실제로는 '불안정 노동'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내가 자**에게 소송을 제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돈이 필요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소개서를 몇 차례나 수정했다. 


 부모들은 내가 그동안 작성한 활동 일지도 조회할 수 있었다. 나를 선택해주길 바라는 내 입장에서는 활동 일지를 자세히 쓰기 위해 노동 시간이 종료된 후에도 자** 활동에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물론 부모에게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지만 선생님 선택율을 완전히 무시한 선택은 아니었다. 나는 하루에도 수백 번씩 자** 어플을 본다. 새로운 공고가 뜨면 빨리 지원하는 사람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가 활동 일지를 쓰는 시간, 어플을 모니터링하는 시간은 노동시간에 산입되지 않는다. 이 시간은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내가 노동을 위해 보낸 시간에는 아무도 값을 매겨 주지 않았다. 


 가난과 부유함 사이의 차이를 이용하는 이 중개업이 도덕적으로 정당한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고를 찾고, 지원하고, 떨어지는 나의 시간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이 중개업. 고작 플랫폼을 운영하는 것만으로 막대한 수수료를 떼어 가는 중개업. 이 중개업은 정당한가? 노동의 대가는 2만 4천원인데, 부모는 그 대가로 3만 2천원을 낸다. 그럼 수수료가 25%나 된다. 1대1 매칭을 해줬다는 행위만으로 그 정도의 수수료를 받을 자격이 있는 걸까? 물론 어플 개발자와 관리자, 상담노동자들의 급여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수수료는 부과될 수 있다. 시스템 운영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러나 자**와 같이 비용의 25%를 수수료로 가져가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다. 노동자를 특수고용노동자라 부르며 법의 보호 바깥에 둠과 동시에 법의 부재를 이용하여 막대한 폭리를 챙기는 일, 이제는 금지되어야 한다. 자**가 막대한 폭리를 챙길 수 있는 것은 그 사업이 가난과 부유함의 격차를 이용하는 노동 탄압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내게는 해고라는 개념이 없다. 애당초 자**와 내가 고용계약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하고 싶은데 일할 수 없는 것이 해고라면, 나는 공고를 찾아보는 매 순간 해고당하고 있는 거다. 하지만 나도 부당하게 일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투쟁할 권리가 있다. 노동자기 때문이다.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 중 노동조합에 가입된 노동자는 고작 3퍼센트에 불과하다. 아마 자**에서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 통고를 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아무런 대항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나에게는 권리를 대변해 줄 노동조합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비정규직이며 특수고용노동자기 때문이다. 특수고용노동자라는 개념은 노동자를 갉아먹는 기생충에 다름없다. 편의와 편리를 방패삼아 노동3권을 탄압하는 자본의 도구다. 우리는 이제 특수고용노동자라는 개념과 비정규직이라는 개념을 없애야만 한다.


 자**를 이용하는 가정은 대부분 강남에 위치해 있다. 내가 방문한 가정도 대부분 그랬다. 대치, 잠실, 서초, 역삼..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가 있는 동네들이다. 가정을 방문할 때에는 양가감정이 들었다. 공손하고 똑똑한 어린이와 깨끗하고 조용한 집에 묘한 거리감과 거부감이 느껴졌다. 주 5회, 하루 5시간씩 교육돌봄을 하면 월급으로 최소 140만원을 받을 수 있다. 부모가 지불하는 돈은 200만원 언저리일 것이다. 한 달에 200만원을 내고 아이를 맡길 수 있는 부모란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하다가도, 영원히 알지 못하고 싶었다. 내가 그들에게 받는 노동의 대가가 사용되는 곳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나는 그저 생을 연장하기 위해 그 돈을 써야 했다. 잠시 쉴 시간을 벌기 위해 십만원을 지출할 수 있는 사람들과 밥을 사 먹을 이만원을 벌기 위해 편도 1시간 20분을 이동하는 나 사이에 아주 두꺼운 벽이 보였다. 어린이는 교육을 잘 받아 똑똑했고 깨끗한 집에 살아 건강했다. 나는 그 어린이들이 좋았다. 그러나 내가 좋아한 것이 어린이라는 존재인지 혹은 부유한 집의 표상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희망은 가장 척박한 땅에서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역설적인 표현처럼, 우리는 가장 외로울 때 서로 함께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서 나의 슬픔을 보지 않을 때까지 우리는 싸워야 한다. 함께이기에 싸울 수 있다. 여성으로서, 비정규직으로서, 노동자로서 그리고 수많은 정체성을 안고 살아가며 나는 매번 크고 단단한 벽을 마주한다. 아무리 두드리고 올라타도 부서지지 않는 벽을 보며 좌절하기 일쑤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마 내가 혼자였다면 그 벽은 영원히 크고 단단했을 것이다. 나 혼자의 싸움이 아니기 때문에 금을 낼 수 있었다. '내'가 아니라 '우리'이기에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다. 다시 읊조려 본다. 우리는 함께할 때 강하다. 우리의 노동이 가난과 부유함의 격차 안에서만 존재하지 않도록, 이 세상이 우리의 노동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도 결국에는 우리의 마주잡은 손일 테다. 포기하지 않고 달리기를 선택하는 그 순간이 모여 우리의 시간을 만든다. 다시 한 번, 힘들어도 슬퍼도 잘 살아내 보자고 말하고 싶다. 내가 내민 손에 당신의 손이 포개어지기를 바란다. 


나는 여성 노동자인 당신이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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