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봄, 그날>
학원에서의 하루는 너무 빠르고, 또 어두웠다.
마치 미래의 시간으로 점프하는 타임머신처럼
후딱, 아무 예고 없이 지나가버렸다.
아침의 해를 봤는지, 점심의 바람을 쐬었는지,
저녁의 달과 별과 인사를 나누었는지 기억도 없었다.
가끔 창밖을 내다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너무 자유로워 보여
한참을 그들의 걸음을 따라 내 눈도 걷곤 했다.
혼자 일하는 원장이 되고 나선 더욱 일에 매이게 됐다.
토요일, 일요일이면 오전 8시 첫 클래스부터 밤 10시 마지막 클래스까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떤 시험기간에는,
담당하고 있는 학교만 12곳이었다.
어디서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자꾸만 헷갈려서,
“지난번에 내가 말했잖아” 하면,
“저희 아니에요.” 아이들이 대꾸하고,
서로 까르르 웃곤 했다.
지친 기색이 너무 안쓰럽고 불쌍했을까.
연애 5년 차, 남자친구가 갑자기 청혼을 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기다려왔던 결혼이었고,
나이가 이미 훌쩍 찬지라 가족 모두들 기뻐했지만
도무지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는 결혼 소식이 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아무래도 혼자 일하다 보니,
분명 결혼 준비와 신혼여행으로
공백이 생길 것이고,
항상 한 달 건너 시험 대비가 껴 있다 보니,
내 사정으로 아이들 학습에
공백이 생기는 것이 미안해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겨우 용기를 내서 말을 꺼냈을 때 아니나 다를까.
그 소식을 듣자마자 “
“선생님이 앞으로 끝까지 해주실 거 같지 않다”며
이별을 고하는 학생들이 생겨났다.
마음이 사실 좋지 않았다. 섭섭함도 들었다.
본인들이 그만 둘 때는
내 사정을 고려해주지 않을 거면서,
나는 평생 언제 그만둘지도 모르는
아이들의 공부를 책임지느라
결혼도 하면 안 되는 건가.
마음 깊은 곳에서 원망 섞인 심술이 올라왔다.
그렇지만, 그 원망과 심술은 내 마음만 더 괴롭힐 뿐.
각자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그 삶 속에서,
나라는 선택지가 더 이상 최선이 되지 못해서
떠나는 건데,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서운할 일도 못 되었다.
그렇게 나는 마음을 다독이며,
떠나는 아이들도 토닥토닥
“끝까지 책임져 주지 못해 미안해."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하였다.
이별이 있으면 만남도 있다는
세상의 이치가 진리여서일까.
하루가 멀다 하고 떠나는 아이들 틈새로
내게 소중한 생명이 찾아왔다.
3월 초, 찬 바람 속 햇살이 따뜻해지고,
여린 잎들이 나뭇가지에 맺히고,
그 사이사이 꽃봉오리들이 쏙 얼굴을 내밀었을 때,
내 안에도 소중한 아가가 자리를 잡았다.
임신테스기의 두 줄 보다,
초음파에 보이는 아기집이 너무도 신기해,
의사 선생님이 이곳저곳 배를 문지를 때마다
자세히 보고 싶어 눈을 더 크게 뜨곤 했다.
아기집을 보던 의사 선생님이
갑자기 고개를 갸우뚱하시며,
"우리 이거 시험관 아니죠?" 물으셨다.
"네. 시험관 아닌데 왜요?" 다시 내가 물으니,
"아기집이 4개가 보여요. 한꺼번에 다 안 찍히는데요.
자연임신으로 4 쌍둥이라니,
제 의사 생활동안 직접 보는 건 처음입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초음파 사진 하나는 제가 간직해도 될까요?"
4 쌍둥이라니, 막막함도 있었지만
70만 분의 1이라는 확률 때문인지
가만히 누워 배를 만지면,
내 안에 또 다른 생명들이 있다는 것에,
신기한 마음이 들어 더 마음이 부푸는 것 같았다.
결혼과 동시에 찾아온
이 기적 같은 소식이 너무 귀하고, 또 귀해,
구름 낀 하늘도, 스치는 바람도, 코끝에 닿는 꽃내음도
그 봄은 모든 것이 분홍빛 같았다.
어느 날이었을까. 출근하는 길.
아파트 둘레길을 따라 지하철로 걷는데
흩날리는 벚꽃 사이
군데군데 피어오른 개나리가
너무 예뻐 마음이 꽉 찼다.
세상이 모든 아름다운 색깔로
나와 아가들을 축복하는 것 같았다.
뒤죽박죽 여기저기 끌려다니고
마음 고생하던 내 30대 전반부가
이렇게 결혼과 임신, 출산으로
다정하게 마무리되는구나.
좋은 선생님만 꿈꿔왔던 내 삶에,
좋은 아내와 좋은 엄마의 역할도 생길 수 있겠다.
그런 희망이 보였다.
그렇게 매일을 형형색색의 색깔로 채우며,
그때 나는 인생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시간이 흘러 그렇게 또 한 달이 지나,
그 해 1학기, 첫 중간고사. 고3 아이들과 시험 전날 마지막 수업 중이었다.
유난히 피곤하고, 배가 콕콕 아팠다.
잠깐만 앉고 싶었는데,
내일이 불안한 아이들은 쉴 틈도 없이
질문에 질문을 이어갔다.
이미 결혼 소식으로 많은 학생들이 퇴원한 터라
임신 소식은 차마 꺼낼 수 없어서
아픈 티도 내지 못하던 때였다.
나는 아픈 배를 부여잡고, 아이들 하나하나를 봐주며,
그들의 내일을 같이 준비하였다.
드디어 마지막 아이들도 떠났고,
그제야 나는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고갤 들어 올려다본 형광등 불빛이
너무 파랗게 눈부셨다.
그 아래 앉아 있으니 눈앞이 캄캄해져
마음도 빙글빙글 돌았다.
“오늘도 무사히 끝냈다”는 안도감과,
“너무 힘들다”는 지침 사이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때, 걸터앉은 내 다리 사이로
따뜻한 무언가가 흘렀다.
피였다. 빨간 피가 교실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나는,
아기들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응급실에 실려갔고, 급하게 수술을 받았다.
마취 수술을 한 거 같은데,
배가 너무 아픈 게 계속 느껴졌다.
‘너무 아파요...’
울먹이며 눈을 떠보니 엄마가 보였다.
부스스한 머리, 핏기 없는 얼굴,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엄마.
그 눈빛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달려온 엄마는
눈물이 가득 찬 얼굴로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내 딸이지만 일만 열심히 하라고
미련하게 가르쳐 미안하단 말과 함께.
바로 퇴원은 했지만,
유산도 출산과 똑같다며 며칠은 쉬어야 한다고
다들 수업을 말려 며칠 동안 그냥 누워 있기로 했다.
나는 항상 수업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런 일을 겪고 보니,
내가 뭔갈 잘못 생각하고 있던 느낌이었다.
아이들이 임신을 몰랐기 때문에
당연히 유산 소식도 몰라,
나는 갑자기 아픈 것으로 하여,
내 수업을 예전에 함께 일했던 선생님께 맡겼다.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바로 달려와
나를 대신해 준 그녀를 보며
나는 그 마음 하나에 그래도 인복이 있구나,
스스로를 위로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그런데, 며칠 동안 회복한 후
다시 교실에 돌아가려 했을 때,
나는 더 이상 그 교실의 문턱을 넘을 수 없었다.
그 봄 그날, 그 교실 바닥을 적시던 그 피가, 그 수술이,
눈물을 삼키며 미역국을 끓여대던 엄마가 자꾸 떠올라 교실 문을 여니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늘 수업을 하던 교실이 아니라
제일 구석진 교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 교실에 남겨둔 마음만은
어디에도 옮겨지지 않았지만.
그냥 내가 며칠 아팠던 줄 알고 있는 아이들은
교실이 바뀌어 궁금함이 가득 찬 얼굴로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기다리며 내 얼굴만 바라봤다.
“왜?”
“왜 여기서 수업해요?”
“그냥 분위기 바꿔보고 싶어서,”
"여기 좁고 창문도 못 여는데요."
"그냥 하자~ 다른 데로도 옮겨서 할 거야."
"에이. 이전 교실이 좋은데."
그러면서 다시 또 까르르.
그 웃음에 나는 학생들은 몰라 다행이다,
마음을 놓았다.
그런데, 내 마음이 너무 아파서
그 후로는 수업이 예전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은 유산이란 것 자체가
아이의 염색체 이상이나,
유전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니
죄책감을 갖지 말라고
수도 없이 강조했지만,
그 말은 사실 위로가 되지 못했다.
학생들을 원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내가 나를 미뤘던 그날의 선택이
계속 마음 한편을 무겁게 눌렀다.
그냥 조금만 더 일찍 앉았더라면,
그날 한 번만 쉬었더라면,
아이들에게 오늘은 일찍 가서 톡으로 질문하라고 하고,
나는 집에서 누워있었다면, 달라졌을까?
그 모든 생각들이 나를 더 깊은 죄책감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은
결국 내가 무엇을 위해 일을 하고 있는지,
누구를 위해 고통을 참고 있는지,
왜 그렇게 무거운 책임감을
의문도 갖지 않고 지고 있는지,
이제껏 해 왔던 나의 모든 일들에
갑자기 다 물음표를 가지게 만들었다.
나는 이제 아름답게 활짝 피어있던 목련에서,
길에 떨어져 여기저기 밟혀
까맣게 변해버린 꽃 이파리도 못 되는 기분이었다.
나를 위해 축제처럼 피어올라오던 그 꽃들이,
너의 시간은 끝났다며,
거친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 흩날렸고,
흩날리는 꽃바람을 타고 세상이 끝난 것처럼,
하염없이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그 봄, 상실감과 죄책감으로
괴로운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남편 또한 나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한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주 않아 밥을 먹다가 한 없이 처진 그의 어깨를 보며,
나는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무엇이 정말 소중했고, 어디에 내가 있어야 했는지를.
그리고 누가 우선이었어야 했는지.
내 인생에서 무엇이,
누가, 어떤 일이 더 먼저여야 했는지.
그제야 나는 조금 알 것 같았다.
내게 아쉽게 한 번의 봄은 지나갔지만,
더 나은 봄을 위해 내 마음은, 다시 정리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