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듯하다고 해서, 다 봄은 아니다>
문턱이 없는 나의 직업 세계
그건 직업일 때만이 아니라
학원을 직접 열 때도 그랬다.
누구나 대학 졸업장과 성범죄 이력만 없으면,
학원은 생각보다 쉽게 세울 수 있다.
초기 시설과 설립자 인허가는
조금 힘든 과정일지 몰라도,
약간의 권리금을 주고 기존 학원을 인수하면
누구나 쉽게 원장이 될 수 있었다.
전 수학학원 원장님을 따라
교육청에 가서 과목 신고를 다시 하고,
학원명을 바꾸었다.
전 학원이 오픈한 지 1년 남짓 된 학원이었기에
손댈 시설은 거의 없었지만, 영어의 느낌을 담고 싶어
군데군데 영어 타이포 벽지를 붙였다.
사실 다 내 만족이었다.
첫 학생은 WJ와 그 친구였다.
교실은 다섯 개인데, 학생은 둘, 선생님은 나 하나.
나는 오히려 괜찮았는데,
둘은 내 수입을 걱정해 주었다.
하지만 개원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낯익은 번호로 전화가 왔다.
예뻐했던 중2 여학생의 어머니였다.
“선생님, 학원 오픈하셨어요?”
“네? 어떻게 아셨어요?”
“아니 애가 어디서 듣고 왔는지 꼭 선생님 학원 가야 한다네요. 위치가 어디예요?”
그렇게 한두 명씩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전 학원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지만,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던 원망이 더 커서
그 마음을 자꾸 깊숙이 밀어 넣었다.
개원 한 달 후,
친구의 친구들까지 아이들이 데려오는 바람에
나는 선생님을 채용할 고민까지 하게 되었다.
새로 뽑기보다는,
예전에 함께 일했던 선생님에게 연락을 드렸고,
그렇게 한 해, 두 해, 세 해가 지나니
학원은 어느덧 네 명의 선생님을 포함한
작지만 제법 태를 갖춘 조직이 되었다.
첫 3년은 매일이 봄날 같았다.
언니를 차가운 땅에 묻고 돌아온 날에도 수업을 했고,
아픈 날에도 여전히 쉬지 못했지만,
그래도 내 공간, 내 이름의 간판,
내가 만든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나뿐만 아니라 학생과 선생님
모두 행복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공부하러 오는 곳이지만,
때론 간식 먹으며 수다 떨 수 있는 곳,
선생님들도 다른 무엇보다
수업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
아이들도 질문이 있으면 학원에 오는 날이 아니어도
언제든 문을 두드릴 수 있는 분위기.
나는 내가 그런 공간을 만들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나는 말 그대로 학원을 운영하는 원장이라
학원 운영을 잘했어야 했는데,
그것부터 제대로 못 했기 때문이었다.
모두에게 좋은 공간이 생기려면
돈의 흐름부터 명확해야 했다.
임대료, 관리비, 선생님 급여, 복사기 임대료, 교재비
나갈 돈은 많은데, 들어오는 돈들이 들쭉날쭉이었다.
선생님 채용도 중요했지만,
일단 데스크에서 수납을 관리하는
직원채용이 더 먼저였어야 했다.
그래야 들어오고 나가는
돈의 관리가 좀 더 명확했을 텐데.
운영의 제일 기본인 돈의 흐름을 놓치니
우리 학원은 매달이 적자였다.
게다가 선생님들에게
주어진 수업만 열심히 준비하시라 하고
담임 배정을 하지 않으니
학원에서의 학생들의 학습현황이
학부모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우리 학원을 다니며 아이들이
어떤 부분이 성장해나가고 있는지
부모님들이 전혀 알 방법이 없었다.
나는 그냥 열심의 힘만 믿고
교재만 예쁘게 만들어주면,
아이들이 학원에서 공부만 즐겁게 하고 가면
모든 일이 해결된다 생각했지만,
내가 한 방법은 운영이 아니라 그냥 관리였다.
게다가 제대로 수납을 받지 못해
밀리는 학생이 생기고,
혹여 그 학생이 그만두기라도 하면,
밀린 돈을 재촉하여 받을 용기도 없었다.
당시 나는 능력도 되지 않으면서
원장 멋에 취해 있었던 것이다.
제일 중요한 단어 및 숙제 관리,
정기평가 실력관리와 같은
기초 커리큘럼도 만들어내지 못한 채.
무례한 학생에게는 학생이 그만둘까
싫은 소리를 못해 두 눈을 감았고,
선생님들에게 컴플레인이 나와도
불편한 소리는 되도록 하지 않았다.
좋은 원장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
그때그때 상황을 넘기기 위한 말들로
책임과 기준을 흐리곤 했다.
결국 시스템이 없이 나라는 존재 하나에 움직이는
학원이라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될 때가 많았다.
예시로 단어 시험을 보더라도 똑같은 개수로 틀렸는데
그날그날 내 바쁨에 따라 봐줬다가 안 봐줬다가 하니
누가 단어를 열심히 외웠을까.
그 와중 열심히만 하는 내 진심만 보고
따라오는 학생들도 있긴 했지만
더 다수의 학생을 위해야 했다면
나에겐 기준이 있어야 했고
그 기준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었야 했다.
그게 시스템이란 걸 나는 나중에야 배웠다.
게다가 적자가 계속 누적되니
학생들은 더 이상 학생이 아니라 이달의 미납자로
선생님들은 매달 얼마씩 줘야만 하는 급여 대상자들로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사람을,
특히나 그렇게 좋아하던 학생들을
학생이 아니라 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낯설고, 아팠다.
학생 수가 곧 월 매출로 계산되던 개원 4년 차.
학원이 사람을 키우는 곳이 아니라,
이번 달 꼭 얼마가 나와야 난 버틴다로 계산되던
어느 달이었다.
문턱이 없기에 계속 생겨나는 영어학원들을
막을 수 없었고
혹여 좋은 선생님이 있다는 소문만으로도
학생들은 쉽게 빠져나갔다.
제일 큰 패인은 나는 수업만 할 줄 알았지.
내 고객인 학생과 학부모의 필요를 살피지 못했다.
흐트러진 관리체계로는 열심히 수업을 한다는 표를 낼 수 없었다.
결국 이 세계는 누가 얼마나 잘 가르치는가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잘 관리하여
성적을 올릴 수 있느냐였는데,
나는 그 부분이 너무도 약했었다.
퇴원생이 유독 많아 보이는 달이면 나는 더 작아졌고,
운영자로서의 무력감은 커졌다.
이건 내 무능함의 결과였다.
결국 학원 통장이 마이너스로 들어갈 무렵,
이렇게 더 가다가는 선생님들과도
더 안 좋게 헤어질 것 같아,
하나 둘 조심스레 말씀을 드렸다.
모두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다시 나 혼자 남게 되니,
미안함에, 무능함과 무력감에 절로 눈물이 흘렀다.
빈 교실의 불을 끄고 엉엉 울었다.
더욱이 선생님들께 말을 꺼낼 때마다
“그럴 수 있다”며 위로해 주던 말들이
되려 가슴에 쌓여 큰 짐이 되었다.
나는, 학원을 열 때부터
따듯한 봄을 주고 싶었던 원장이었지만
정작 나부터 따뜻해지는 방법을 몰랐다.
매서움이 있어야 따듯함도 생기는 것이란 걸
그 당시에는 알지 못해
누구에게나 겉만 번지르르한 좋은 말만 했다.
그 말들이 진심이 되지 못했을 때,
모두에게 따뜻함은커녕 춥기만 한 날을 줄 수 있단 걸,
그 무능함 앞에서 너무 날카로워진 현실로 마주해야 했다.
움직이기조차 힘든 날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간 속에서,
나는 비로소 조직을 운영하는 일과
사람을 돌보는 일이 겉은 같아 보이지만
본질은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 위에서,
나는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