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뭐가 걱정이야, 아빠가 있는데?>
돌고 돌아 다시, 그렇게 또.
어두운 밤.
가게 문을 닫고 불을 끈 채, 가만히 앉아
유독 더 밝게 빛나는 쇼케이스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채우고,
많은 사람들의 손길로 비워지고,
다시 채워 넣어야만 비로소 빛나던 그 공간.
하지만 이제는
그 쇼케이스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달라져 있었다.
넉넉함과 만족감보다는, 채워야만 한다는
압박감과 조급함이 앞섰다.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에,
임대인이 괴롭히기 시작한 지도
3개월이 지나가던 무렵이었다.
그 지침과 피로가 표정에 드러났던 걸까.
며칠 후, 아버지에게 연락이 왔다.
조그마한 꼬마빌딩을 지을 계획이라며
1층 자리를 내어줄 테니
거기서 다시 장사를 해보지 않겠냐고 하셨다.
“신도시라 아직 사람은 별로 없어도,
월세 걱정도 없고, 집주인 눈치도 안 봐도 되잖아.
쉬엄쉬엄, 네 템포대로 해봐.”
그리고는, 늘 그러셨듯이 이렇게 덧붙이셨다.
“너는 뭐가 걱정이야. 아빠가 있는데.
아빠는, 너 고생하는 거 정말 싫어.
그냥 안 팔려도 좋으니 좋은 음악 틀어놓고
쉬엄쉬엄 살아.”
내가 주눅 들 때마다 아빠가 꺼내시던 그 말.
이번에도, 그 말 한마디가
나를 단단하게 붙잡아 주었다.
그 말 한마디로 내 갈림길 중 하나에
가로수 조명이 켜지는 느낌이었다.
건물 완공까지는 약 3~4개월.
그 사이 치료도 받고,
조금 쉬면 괜찮을 것 같았다.
남편도 동의했다.
우리는 전당포와 도장 가게 사이,
조그마한 가게 자리를
다음 봄을 위해 잠시 떠나보내기로 했다.
그동안 아껴 모은 장비와 설비는
창고에 조심스레 옮기고,
하나하나 정리해 나갔다.
마음이란 참 이상하다.
결정하기 전까지는 수많은 갈래길이 보이더니,
마음을 정하고 나니
오직 그 한 길만이 내 앞에 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 길이 순리여서였을까.
모든 정리는 한 치의 삐걱임 없이 차분하게 흘러갔다.
그곳에 담긴 기쁨, 분노, 감사, 눈물,
그 감정들만 빼고.
마지막 날.
2년의 시간이 담긴 그 공간은
텅 비어 있었지만 오히려 더 찬란해 보였다.
마치 공간 곳곳에
빔프로젝터로 장면이 투영되듯,
수많은 순간들이 떠올랐다.
내 첫 디저트 가게.
수많은 손님들의 응원과 사랑이 깃든,
'나의 봄'이 그렇게 떠나가고 있었다.
가게 문을 닫고 처음 며칠은 정말 잠만 잤다.
먹는 것도 잊고.
그러다 더는 잠도 오지 않을 즈음
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나는 애초에
‘쉰다’는 감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무엇으로 시간을 채워도
상실감은 틈틈이 스며들었다.
보름쯤 지났을 무렵,
건축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다.
“자재 수입이 막혀서
공사가 예상보다 길어질 것 같다”는 소식.
코로나 시기였기에,
아빠가 짓고 있던 꼬마상가빌딩은
그 겨울은 지나야 완공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렇게, 내게 주어진 ‘쉼’은 3-4개월에서
7-8개월로 늘어나버렸다.
바쁘게 살다가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졌다는
상실감도 컸지만 현실은 더 무거웠다.
우리에겐 ‘빚’이 있었다.
가게를 해본 사람이라면 알 거다.
아무리 매출이 좋아도
순이익은 그리 많지 않다는 걸.
디저트는 트렌드 변화가 빠르고
재료 단가도 높아 신제품을 만들려면
언제나 비용과 시간이 든다.
그런 과정을 반복하며 우리는 빚을 감당해 왔다.
그리고 그 빚은,
이제 남편 혼자 책임지고 있었다.
가게를 연 것도, 사업을 확장한 것도
모두 나였는데,
이제 생활비를 남편에게 받는 일이
너무 미안했다.
결국 아르바이트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구직 사이트를 뒤졌다.
그때 내 나이, 서른아홉.
‘다시 시작하기엔 늦었을까’라는 말이,
머릿속에 자꾸 맴돌았다.
게다가 내가 해온 일이라고는
14~15년의 영어 강사 경력,
그리고 2년 남짓한 디저트 가게 운영뿐.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강사 일이 제일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다른 학원에 지원하기엔 내 나이가 걸렸다.
혹시 원장님이 나보다 어리면 나는 어떻게 보일까.
이런저런 생각이 스쳤지만,
그래도 집에서 가만히 걱정만 하는 것보다
움직이는 편이 낫다고 느꼈다.
익숙하게 강사 채용 사이트를 샅샅이 살펴봤다.
그리고는 이름이 눈에 익은 학원 몇 군데에
이력서를 넣었다.
오랜만에 나서는 만큼 다시,
이름 있는 곳들에서
객관적으로 나를 다시 시험해보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일부러 동네 근처가 아닌
교육열이 센 곳 세 곳을 골랐다.
대치동 두 곳, 목동 한 곳.
다행히 모두 시강과 면접까지 통과했다.
세 학원 중 내가 선택한 곳은, 20대 시절부터
가보고 싶었던 목동의 학원이었다.
그 시절엔 석·박사급만 채용해서
감히 꿈도 못 꿨던 곳.
이제는 그런 조건이 사라져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게다가 6개월 단위 재계약이라,
언제든 내가 원할 때
돌아갈 수 있다는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그렇게 계약서를 쓰고, 나는 2년 만에
다시 아이들 앞에 섰다.
완전히 새로운 동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교육열이 가장 뜨거운 곳,
목동 앞단지.
단위면적당 학원이 가장 많다는 그곳에서
나는 다시 돌고 돌아, 강사로서 교단에 섰다.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그 자리에서
나는 또 한 번, ‘나의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