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봄을 꿈꾸는 나의 봄(1)

그 겨울, 우리는 서로를 몰랐다

by 나의봄

다가올 처음에 대한 기대는 언제나 화려하다.

하지만 지나간 ‘처음’은

대개 아쉬움과 섭섭함에 눅눅하고, 무겁고, 건조하다.

마치 오래된 상자 안에 눌려 있던, 빛바랜 사진처럼.


2005년 겨울.

백마마을로 들어서는 버스 안에서,

나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 발을 내딛는 거리,

처음 계약한 학원으로 향하던 그 길.

찬 공기에 입김이 흩날렸지만,

내 마음엔 두려움이 먼저 서려 있었다.


그 순간은 유독 무겁게 다가왔다.

지나가던 사람들의 잰걸음,

책가방을 멘 학생들,

건물 앞 삼삼오오 모여 있던 아이들,

그리고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어두운 얼굴들.

그 모든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때 나는 스물다섯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몇 번의 취업 낙방을 겪은 뒤

무너진 계절을 건너던 겨울.

어깨는 자꾸만 아래로, 고개는 자꾸만 숙여졌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일은

그 시절의 나에게 너무도 큰 결심이자,

어쩌면 가장 용기 있는 선택이었다.


학원 앞에 도착한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손잡이를 꽉 쥐고

약속된 학원의 문을 열었다.


내게 주어진 첫 수업은

예비고1 대상의 수능 독해 수업.

설렘과 걱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서 있던 나와

새 출발을 앞둔 아이들이 함께 있었다.


그 아이들은 어떤 감정이었을까.

설렜을까, 두려웠을까.


너무 초보 교사였던 나는

아이들의 표정 하나, 숨결 하나 살필 겨를도 없이

서둘러 수업을 시작했다.


그 순간 눈에 들어온 단 한 명의 아이.

유독 조용하게 앉아 있던 남학생.

하얀 얼굴, 검은 테 안경, 단정한 머리카락.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 아이는 내 수업을 듣지 않고 있었다.

교실을 가득 채운 스무 명 중

유일하게 아무 말도 듣지 않고,

유일하게 나를 보지 않았다.


애써 외면해보려 했지만

그 아이는 자꾸 내 시야를 뚫고 들어왔다.


그리고…

한참을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그 하얀 손을 움직여 그가 가방 속에서 꺼낸 것은

내가 가르치는 수업의 ‘답지’였다.


그 아이는 답지를 펼쳐

내 입모양과 비교하고 있었다.


나는 그 눈빛에서

증오에 가까운 낯선 차가움을 느꼈다.


“아, 이 아이는…

나를, 내 수업을 믿지 않는구나.”


그 순간, 발끝부터 올라온 서늘한 기운.

말이 되기 전부터 떨림이 찾아왔고

곧, 눈물이 되었다.


수업 시작 10분도 되지 않아

나는 아이들 앞에서 울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도 어리석고 부끄러운 장면.


눈물을 재빨리 닦아낼 생각에

‘잠시만’ 이야기를 건네고

교실을 나서 화장실로 향했다.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다.

지금 이 교실에서 나는 혼자다.

여기서 무너지면 나는 끝이다.”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울리던 그 생각.


그 순간, 나의 본능이 조용히 말했다.

“지금 포기하면, 넌 아무것도 될 수 없어.”


나는 다시 크게 숨을 들이쉬고,

무너지지 않은 척,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다음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무엇을 가르쳤는지도, 아이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도..


기억나는 건 단 하나.


“시간은 흐를 것이다.

이 수업은 반드시 끝이 날 것이다.

그러니 그냥, 끝까지 해내자.”


나의 첫 수업은 그렇게 끝났다.


문제는,

그다음 날도 그 반을 또 가르쳐야 했다는 것.


그 아이가 무서웠다.

나는 이미 ‘처음부터 울어버린 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람마다 넘는 겨울이 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다음 날

다시 교실로 들어갔고,

아이들에게 농담을 던졌고,

단단히 준비해 온 수업을 차근차근 진행했다.


수업이 끝난 뒤,

그 학생이 조용히 나를 따라 나왔다.

작은 쪽지와 초콜릿을 들고.


쪽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최근 외고에 떨어졌어요.

그래서 심술이 나 있었어요.

너무 어린 선생님이라 불안했어요.

상처드릴 생각은 없었어요. 죄송합니다.”


나는 알게 되었다.

그 겨울을 건너던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 교실에는

설렘 속에 고등학교를 준비하던 아이들도 있었고,

낙심과 실패 속에 숨죽인 아이들도 있었다.


그때 나는 아직 어려

그 마음을 충분히 들여다보지 못했고,

내가 먼저 부서져 있었기에

누군가를 따뜻하게 품을 여유가 없었다.


살다 보면

어떤 시간은 한겨울의 입김처럼

너무 차갑고,

그 차가움 속에 나를 얼려버릴 듯하지만,


가끔,

그 하얀 숨결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공기이기도 하다.


나의 겨울이 그랬다.

선생님으로서의 첫 시작.

그 겨울이, 바로 그런 시간이었다.


모든 걸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괴로움에 빠져있을 때,

강단 위 누군가에게 내가 알고 있는 걸 전하며,

따뜻함을 품게 된

내 첫 사회생활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