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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urStellar Mar 22. 2024

수선화 꽃이 피었습니다

- 봄의 전령사, 수선화 꽃에 대한 찬사

떠밀리듯 들어온 찌푸린 햇살이 베란다에 그렁그렁했다. 조각구름 사이로 희미한 햇살이 베란다 유리를 넘어 거실로 들어왔다. 날씨도 인정이라는 것이 있는지 오랜만에 비가 그쳤다. 마음 같아서는 이것도 햇볕이냐고 해를 보며 타박하고 싶었지만, 행여 삐치기라도 할까 봐 눈치 보면서 부드러운 햇살에 고개를 내밀었다.


겨울인데도 비가 잦았다. 겨울이 끝나가는데도 비는 사나흘 걸러 내렸다. 하루 흐리다가 또 사나흘 비. 겨울 비는 세상을 무채색으로 만들었다. 하늘에는 회색 구름이 가득하고, 비에 젖은 아스팔트는 검은빛이 더 선명했다. 길 위의 사람들은 두터운 패딩을 입었으며, 손에 든 튼튼한 검은색 우산 위로 싸늘한 빗물이 내렸다. 날이 추워 눈이라도 내리면 그나마 좀 나을 텐데. 겨울비 오는 날에는 우중충한 회색과 검정만 있을 뿐이다. 해가 떠서 하루가 시작하고, 해가 져서 하루가 끝나는 날을 본 지 오래다. 빨주노초파남보. 총천연색 무지개 빛깔을 본 지 오래다. 무채색에 질려 버린 망막은 마른풀처럼 생기를 잃었다.


모처럼 다가온 희미한 햇살에 서서히 드러나는 색깔. 비 맞은 검은 나무 기둥이 밝아지고 화석 같은 가지 끝에 연두가 얼른거린다. 양지쪽 벚꽃나무 끝에도 옅은 분홍 빛이 감돌고 있다. 오랜만에 보는 미광에 동공이 흔들린다. 혹시 잘못 보지 않았나 싶어 눈을 비빈다. 이제 막 봄 볕이 들기 시작했는데 벌써 꽃 봉오리가 들리 만무하다. 마음만 앞선다고 봄이 빨리 오는 것도 아닌데, 혼자 치는 설레발이 민망해서 눈길을 거둔다.


이런!

‘베란다 화분에서 수선화 봉오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파리한 초록 곧은 줄기 위에 노르스름한 게 뭉쳐있다. 올라온 지 제법 되었을 것 같은데 여태 모르고 있었다. 이제나 저제나 꽃이 필까 노심초사하며 지켜보았는데도 꽃망울이 생긴 줄도 몰랐으니, 뭘 보고 있었던 건지, 잠시 망연해진다. 못 볼 리가 없었는데 왜 못 보았을까? 못 본 까닭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내 서투른 관찰력 때문인가? 아니면 수선화가 나 몰래 순식간에 올라온 것인가?


꽃망울 놓친 것은 내 잘못이 아니었다. 수선화의 성급함도 아니었다. 몇 날 며칠 계속된 비 때문이다. 비 오는 날, 암회색 무채색은 수선화의 노란 꽃망울마저 묻어버린 것이다. 무채색은 샛노란 수선화를 짙은 회색으로 덧칠하여 노랑을 덮여버렸다. 그러지 않고서는 봉오리 피는 수선화를 내가 모를 리 없다.




수선화는 노란 햇살에서 빛이 난다. 제 아무리 생생한 수선화라도 햇빛이 없는 곳에서는 색 바랜 노랑일 뿐이다. 햇빛이 있는 곳에서 색은 빛난다. 구름 속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작은 햇살에도 수선화는 노랑을 뿜고 있다. 빛이 있어 베란다 작은 화분 속 수선화는 어엿한 수선화가 되었다. 노랑을 가진 수선화가 되었다.


올봄에 핀 수선화는 특별하다. 지금까지 수선화에 봄은 한 때 지나가는 시간이었다. 꽃이 지면, 화분도 사라졌다. 새봄이 오면 아쉬워 새 화분을 사고, 그렇게 많은 수선화를 보냈다. 하지만 올봄에 핀 수선화는 지난겨울을 넘기고 다시 피었다. 지난봄 꽃을 보고 난 후, 꽃이 졌을 때 알뿌리를 캐 보관했다. 우울한 겨울비에 봄이 오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불현듯 생각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심었다. 흙 속에 알뿌리를 묻고 물을 주었다.

 물뿌리개를 잡은 손이 조심스레 떨렸다.


흙이 마술을 부렸는지, 알뿌리에 신령이 들었는지 며칠 후 싹이 트고 줄기가 올라왔다. 파릇한 줄기가 죽죽 자라는 것도 고마운데 꽃까지 피우다니, 경이로운 과정이었다. 뭔가 해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를 가엽게 여겨 꽃을 피운 수선화의 드넓은 마음이여, 네 아량에 감사할 따름이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수선화는 하루가 다르게 꽃잎을 키웠다. 노랑으로 채색된 꽃잎은 햇살 속에 노랑의 기운을 퍼뜨려 베란다를 가득 채웠다.


수선화는 봄의 전령사다. 모든 수선화는 주연이다. 파리하고 꼿꼿한 줄기에서 대담하게 피는 꽃은 조연을 거부한다. 한 포기 줄기에 하나의 꽃잎. 수선화 꽃은 줄기의 주연이다. 한 포기에 크고 작은 많은 꽃이 피는, 주연과 조연이 구분되는 꽃과 달리, 수선화는 오로지 하나다. 홀로 있는 수선화는 고고하다. 고고하지만, 독선적이지 않다. 무리 지어 있어도 불협화음을 내지 않는다. 들녘이나 화단에 여럿이 같이 있으면 가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혼자서는 명료하고, 함께 있으면 유연하다. 주연이되 나서지 않는 수선화는 꽃이 주는 자존감이다.


같은 알뿌리 화초인 튤립도 좋다. 수선화는 우리말이고, 튤립에는 왜 우리말 이름이 없는지 모르겠다. 말은 물건과 같이 모양이 있어 거리감을 만든다. 최근 흔해졌지만 튤립은 여전히 이국적이다. 왕관 모양 꽃 봉오리는 신비감을 준다. 봉오리 안에 품은 궁금증을 간직할 때가 꽃의 절정이다. 반면, 수선화는 봉오리를 맺자마자 활짝 핀다. 숨길 것 없다는 듯 태양을 향해 꽃잎을 한껏 펼치고는 꽃잎 속 원뿔 모양 꽃 수술을 마음껏 돌출한다. 있는 모두를 보여 주리라는 자세다. 활짝 피었을 때 보다 약간 봉우리 졌을 때가 예쁘다는 보통 꽃과 달리 수선화는 처음부터 활짝 핀다. 처음부터 태양아래 자신을 펼친다. 그러고도 아주 오래 시들지 않고 꼿꼿하게 피어있다. 어디서 오는 자신감일까? 감추지 않는 수선화는 당당한 꽃이다.




수선화 꽃보다 ‘수선화’라는 이름을 먼저 알았던 것 같다. 이름이 독특해서 기억했고, 나중 누군가가 노란 꽃을 ‘수선화’라고 했을 때 수선화를 제대로 알았다. 흔한 꽃이 아닌데도 제대로 된 우리말 이름이 있는 것이 특별했다.


노란색 수선화를 다시 만난 때가 학생시절 국어 책에서였던 것 같다. 영국 시인 ‘윌리엄 워드워즈’의 ‘수선화’라는 시를 접했을 때 느낀 생경함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영국이라는 잘난 나라 유명 시인이 읊은 시를 읽으면서 왜 그 시가 유명한지 알 수 없었다. 자연을 동경하고 사람감정 이입이 없는 자연을 자연으로서 노래하는 시인이라고 하는데,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연을 그리는 박목월 시인, 연인을 떠나보내는 애틋한 마음을 노래한 김소월 시와 같은 감동이 없었다. 유명한 시인데 나만 못 느끼는,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


    하늘 높이 골짜기와 언덕 위를 떠도는

    구름처럼 홀로 떠돌다가

    문득 나는 보았네. 수없이 많은

    황금빛 수선화가 크나큰 무리 지어

    호숫가 나무 밑에서

                    -- 워드워즈 <수선화> 중


자연을 있는 그대로 노래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가 싶었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연에서 느낀 바를 시인의 내면 속 감정과 결합하여 시적 언어로 뱉어내는 것이 시가 아닌가! 그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노래한다니, 그것이 시가 될 수 있을까.


집에는 세계 명작 전집이 책장에 꽂혀있었다. 졸업 후 직장에 다니는 누나가 월부로 사놓은 전집이었다. 당시 시골이지만 여느 집에는 읽지는 않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집 한 질 정도는 남루한 책꽂이에 두곤 했다. 꽂아두고 누구 하나 관심을 가지지 않는 책 속에서 ‘워드워즈라’ 씐 책등이 보였다. 빽빽하게 꽂힌 책 속에서 책을 빼내 펼쳤다. 워드워즈의 다른 시를 보면 볼수록 미궁으로 빠졌다. 도대체 왜 이 시인이 유명한지 더 이해할 수 없었다.


교과서에 보았던 ‘수선화’를 찾았다. 아마 번역이 잘 못 되었을 수도 있다. 영어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에게는 대담한 생각일 수도 있었다.


원문은 훌륭한데 번역이 못 따라가 잘 전달이 안될 수도 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런 시를 명시라고 교과서에 소개할 수 없다. 전집 책에는 영어로 된 원문이 한쪽에 그리고 맞은편에는 한글로 번역된 시가 나란히 있었다. 게다가 시에 알맞은 배경 그림까지 있었다. 모르는 영어 단어를 사전을 찾아가면서 영어와 한글을 번갈아 보면서 읽었다. 어떻게 번역된 건지 대충 알 만했다. 짧은 영어 수준이지만 번역이 엉터리는 아니다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워드워즈의 시 본래가 그런 것이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 찬미하는 것이 뭐 그리 대수일까? 그것이 시라는 문학에서 크게 인정되는 건가?라는 생각은 그 뒤에도 오랫동안 희미한 의혹으로 남았었다.




뿌리 세 개를 심어 모두 줄기가 나왔지만, 그중 하나만 수선화가 피었다. 난초 같은 초록 잎에 달린 노란 꽃송이를 본다. 그리고 상상한다.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언덕, 하늘에는 솜사탕 같은 구름이 흘러가고 언덕에는 노란 수선화 무리가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다. 환한 태양 아래 흔들리는 수선화 속을 나는 걷고 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노랑의 눈부심, 땅에서 오물거리는 작은 노랑의 속삭임. 내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내 몸에 닿는 자연을 자연 그대로 받아들여 보려고 한다. 자연을 자연 그대로 받아들일 때 진정한 내가 충만된다. 거기에 작은 사심이라도 들어간다면 손 때 묻은 투명 수정 구슬처럼 흐려질 것이다.


수선화 꽃이 피었다. 활짝 피었다. 어떤 꽃은 피면서 지기 시작하나, 수선화는 피고 나서도 오랫동안 같이 지내는 미덕이 있다. 음유시인 워드워즈가 사랑했던 꽃. 자연을 자연 그대로 볼 수 있도록 해 준 꽃. 봄이 무르익으면 꽃은 시들겠지만, 내년에도 다시 그 모습 그대로 볼 수 있어, 잠시동안이지만 보내는 서운함을 거둘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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