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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urStellar Mar 30. 2024

벚꽃장 봄소풍

- 봄소풍에 얽힌 추억

뜨겁게 달아오른 냄비에 팝콘 터지듯 벚꽃이 활짝 피었다. 잦은 비와 잿빛 하늘을 탓하지 않고 양지바른 곳부터 시작해서 아파트 인도 양 옆에도 환하게 피었다. 걸음을 멈춘 행인은 하얗게 핀 벚꽃에 취한 듯 자연스럽게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다. 주말 날씨가 좋으 벚꽃을 즐기려는 연인과 가족으로 아스팔트 길이 북적거릴 것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벚꽃이 유명하다. 해마다 벚꽃 철이 되면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유명한 벚꽃 축제가 열린다. 축제 때가 되면 작은 도시는 봄 아지랑이처럼 설렘이 피어오른다. 벚꽃장이라 부르는 벚꽃이 많고 행사가 열리는 시내 일대는 짧은 봄을 즐기려는 관광객과 시민으로 가득 찬다. 벚꽃장은 전국 각지서 몰려든 장사꾼의 집결지이기도 하다. 벚꽃장에 가득한 갖가지 물건을 구경하고 팔도 음식을 맛보는 것도 벚꽃 구경 못지않게 재미가 있다. 도로를 꽉 매운 차량,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인파, 도로 한가운데서 순경이 부는 호루라기 소리, 장사들이 틀어 놓은 질 낮은 스피커서 울려 나오는 노랫소리, 펄럭이는 행사 깃발 위로 흩날리는 꽃잎으로 벚꽃장은 봄기운처럼 부풀어 오른다. 사람들로 시끄럽고 북적일 때 이곳 사람들은 흔히 ‘벚꽃장 같다’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 이유를 충분히 알만하다.


대개 현지인은 해마다 하는 축제에 너무 익숙해져 무덤덤하기 십상이다. 이곳 벚꽃 축제는 작은 도시서 열리는 축제라 그런지 시민이 보이는 관심은 무심하지 않다. 올해 벚꽃이 늦어 축제 기간을 잘 못 잡았다, 올 벚꽃은 가뭄 때문인지 작년보다 못하다, 올 해는 사람이 많이 몰려 인근 도시서부터 차가 막혔다는 등 시민의 관심은 은근하고도깊다. 한 때 벚꽃이 일본 국화라서 배척되기도 했지만, 왕벚꽃 원산지가 제주도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시 예전 분위기로 돌아왔다. 벚꽃이 피는 한 축제는 계속되고, 작은 도시 시민의 벚꽃과 축제에 대한 애정도 늘 그대로 일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자랐던 곳은 벚꽃 축제가 열리는 곳이 아니다. 축제가 열리는 벚꽃장은 시내 중심부 일대이고, 나는 거기서 20Km 정도 떨어진 시골에서 자랐다. 시내에 있는 고등학교에 가서야 시내에서 열리는 벚꽃 축제를 제대로 접할 수 있었다. 그전에도 친구랑 한 두 번 놀러 간 기억만 있다. 당시 아이들이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가는 일은 큰 맘을 먹어야 했다.


시내에서 열리는 벚꽃 축제가 유명하기는 하지만, 벚꽃이라면 우리 마을 사람들도 나름 자부심이 있었다. 시내 벚꽃 나무도 오래되고 꽃이 좋지만, 우리 마을 벚꽃장에 비할 바는 아니라 생각했다. 우리 마을 벚꽃장이 한 수 정도는 위로 생각했다. 외지 사람이 아름드리 벚나무에 만개한, 온 하늘을 덮은 우리 마을 벚꽃장을 본다면, 시내 벚꽃 나무는 작은 묘목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다만 시골이라 잘 알려지지 않아 많은 이들이 볼 수 없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우리 마을은 산 아래 자리 잡은 제법 가구수가 많은 동네이다. 산과 마을 사이는 커다란 저수지가 있다. 산 아래 저수지는 농사에 쓰는 여느 시골의 웅덩이 같은 저수지가 아니다. 저수지는 일제 강점기 때 시내에 위치한 군부대 식수를 확보하기 위해 축조되었다. 숲이 좋은 마을 뒷산에 내려오는 물을 가두기 위해 튼튼한 제방을 쌓고, 제방 위는 화강암을 깎아 난간을 만들었다. 둑 안쪽 저수지 바닥도 화강암을 깔아 제방이 안전하도록 만들었다. 저수지 끝 한쪽은 화강암을 깐 커다란 계단을 만들어 계단을 따라 물이 넘치도록 하였다. 저수지서 넘친 물은 마을 개천을 지나 앞바다로 흐른다. 지금 봐도 전혀 조잡하지 않은 튼튼하고 세련된 저수지이다. 조무래기 시절 깨끗하게 씻긴 저수지 난간 화강암 위로 걸으면서, 일본 놈이 잘 만들어서가 아닌, 사실은 마을 사람이 힘든 부역 해서 만든 거라고 우리끼리 자랑스러워했다.


45도로 기울어진 제방 아래는 뜰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넓은 공간이 있었다. 뜰을 지나면 밭이 있고 밭이 끝나고 개울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면 마을이 시작되었다. 뜰이 얼마나 넓은 지를 말하려고 하니 가늠이 안된다. 어린 시절 저수지 끝에서 끝까지 걷기에는 다리가 아픈 거리였다. 비스듬한 제방 끝에서 끝까지 길이도 길었지만, 제방 아래서 시작된 너비도 상당했다. 적어도 축구장 네다섯 배는 되지 않을까.


뜰에는 아름드리 벚나무가 가득했다. 고목 같은 굵은 왕벚나무가 간격을 두고 뜰을 채웠다. 뜰 바닥에는 키 작은 풀이 나있고, 사람이 다닌 발자국이 만든 좁은 길이 군데군데 나 있었다. 벚나무 그늘 아래 아무 데라도 자리만 깐다면 쉴 자리가 마련되었다.


봄이 되면 아름드리 고목은 왕방울만 한 벚꽃을 터뜨렸다. 굵다란 나무마다 핀 벚꽃은 저수지 일대를 덮었다. 저수지 둑 난간에서 벚꽃장을 내려다보면 연분홍 꽃구름 위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봄 농사로 바쁜 촌사람이라도 호시절을 그냥 보내기는 힘들었다. 날 좋은 날 하루, 마을 사람들은 저수지 아래에 모여 ‘회치’라고 하는 봄놀이를 했다. 한쪽에 커다란 가마솥을 걸고, 입이 넓은 독에는 농주를 담고, 아낙들은 장롱 깊숙이 둔 한복을 꺼내 입고, 아저씨들은 평소 안 입는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가느다란 대나무 두드리는 장고 장단에 맞춰 벚꽃 아래에서 흐드러지게 놀았다. 마을 사람들은 회치를 하고 모여 사진을 찍었다. 낡은 흑백 사진 속에 지금은 안 계시지는 이웃집 아지매, 아재가 아직도 벚꽃 나무 아래 사진 속에 살아 계신다.


벚꽃장은 어른뿐 아니라 마을 아이에게도 은근한 자랑이었다. 초등학교 봄소풍 6번 중 적어도 몇 번은 가는 단골 장소였다. 학교에서 걸어갈 만한 소풍 장소는 몇 군데 정해져 있었다. 우리 마을 벚꽃장과 더불어 흰 돌 못티라고 불리는 기암석이 많은 바닷가, 신라시대 건축되었다는 산마을에 있는 절, 학교 뒤 바위 절벽을 타고 내리는 폭포 등이 소풍 장소였다. 매번 같은 곳에 간다고 아이들은 투정했지만, 작은 시골학교 아이가 걸어서 갈만이 한 곳은 그 정도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마을 벚꽃장으로 봄 소풍을 가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나와 두 살 터울인 누나도 벚꽃장으로 소풍을 간다고 했다. 아이들 봄 소풍 때문에 어머니는 전날 어묵이랑 몇 가지 도시락 반찬거리를 준비했다. 내가 저학년일 때 어머니는 몇 번 소풍에 따라왔다. 곱게 한복을 입고 나와 누나와 같이 찍은 그때 사진이 아직도 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어머니는 더 그러하지 못했다. 여느 시골 아낙처럼 어머니도 눈만 뜨면 논으로 밭으로, 아니면 품삯 벌러 갔다. 어머니는 마음 한편에 소풍을 같이 가주지 못해서 미안했는지, 4학년 봄 소풍은 할머니가 따라 가 주었으면 했다. 소풍 장소도 집에서 멀지 않은 마을 뒤 벚꽃장이고, 마침 누나도 같은 곳에 소풍을 가므로, 할머니가 소풍 도시락을 싸 가는 걸로 이야기가 되었다.


학교 정문을 나선 아이들은 줄 맞추어 넓은 들을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벚꽃장으로 향했다. 마을을 통과할 때 집 옆을 지나게 되었는데 집 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 조용했다. 누군가가 ‘여기 네 집 아니니?’라고 물었지만 못 들은 척하면서 걸었다. 집 안에 있는 할머니를 생각하면서, 할머니가 하고 있을 일을 생각하면서 따가워지는 봄 볕에 아래 걸음을 옮겼다.


활짝 핀 벚꽃이 지속되는 시간은 얼마나 짧은지 잘 안다. 벚꽃 시기를 딱 맞추어 꽃놀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벚꽃 보려고 봄소풍을 왔지만 봄 소풍이 벚꽃 피는 시기하고 맞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초등학교 봄 소풍은 대개 4~5월이라 벚꽃은 벌써 한참 전에 졌고, 벚나무에는 새잎이 파릇파릇했다. 벚꽃은 없지만 벚나무가 만든 싱그러운 그늘이 아이 무리를 맞이했다. 선생님은 간단한 인원 체크를 한 후 아이들을 풀어 주었다.


풀려난 아이들은 뭘 할지 몰라 서성댔다. 아랑곳하지 않고 선생님들은 한 곳에 모여 교실밖에서 느껴보는 본인의 시간을 가지기 시작했다. 반장이 선생님 우리 뭐해요 물으면 선생님은 재미있게 놀아라라는 말만 했다. 선생님의 대답이 왠지 서운했다. 같이 놀아 주면 좋으련만, 아이들은 어떻게 놀아야 할지 몰랐다. 수건 돌리기라도 하려면 모여야 하는데 모이려 하지 않았다. 삼삼오오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끼리끼리 키득거렸다. 지루해진 아이들은 하나둘씩 도시락을 까먹기 시작했다. 분명 이른 점심이었다. 도시락을 먹는 아이가 늘면서 점심시간 아닌 점심시간이 되어 버렸다. 시골 아이들의 소풍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평소 들고 다니는 책가방에 평소와 다름없는 도시락 반찬이었다. 소풍이랍시고 전혀 특별한 것 없는 날이었다. 그저 공부를 안 하는 날 정도였다. 점심을 다 먹은 아이들은 여전히 할 일이 없어 여기저기 끼리끼리 몰려다녔다.


나는 까먹을 도시락도 없어 벚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아이 몇이 밥 안 먹냐고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도시락 싸가지고 올 거라는 말을 하기가 부끄러웠다. 그냥 여느 시골 아이처럼 나도 평소와 다름없는 책가방에 도시락을 넣어 올 걸. 뭣 하러 소풍이랍시고 할머니에게 도시락을 싸 오라고 했을까. 괜한 원망이 솟아올랐다. 아이들이 밥을 다 먹어 그런지 별도의 점심시간 없이 점심시간이 끝나는 분위기였다. 풀이 죽어 바닥에 풀만 뽑고 있는데 누나가 왔다.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풀이 죽어 있었다. 다들 점심을 먹었는데 못 먹은 아이는 우리 둘 뿐이었다. 누나는 별 말하지 않고 내 옆에 앉았다. 둘은 그저 할머니가 오시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가기는 가는 건지, 한참이 지난 것 같은데도 할머니는 나타나지 않았다. 창피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해서 그런지 배 고픈지 몰랐다. 이 많은 학생 중 우리만 밥을 싸 오게 한 게 창피했다. 소풍이 뭔 특별한 날이라고, 촌 아이면 촌 아이답게 굴어야지. 그러지 않아서 부끄러웠다.


조금 있으면 전학생이 모여 반별 노래자랑을 하는 오후 진행이 곧 될 것 같았다. 조바심마저 사라지려는 때, 벚꽃장으로 올라오는 오솔길에 누군가가 꼬물꼬물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고개를 뻗어 자세히 보니 할머니였다. 기역자로 꼬부라진 허리를 겨우 바치면서 할머니는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오고 있었다. 손에는 도시락을 싼 보자기를 들고 계셨다. 보자기에 싼 도시락이 무거워 꼬챙이 같은 가느다란 손목이 부러질 것 같았다. 할머니의 허리는 더 구부러져 있었다. 집에서 보던 할머니가 아니었다. 할머니의 허리가 도시락 무게 때문에 더 구부러졌는지 모르지만, 밖에서 보는 할머니는 매일 보는 할머니와 달랐다. 할머니의 허리가 이렇게까지 구부러진 줄 몰랐다.


할머니가 도착하자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늦게 온 할머니가 원망스러웠다. 뭣 하다가 이렇게 늦었냐고 할머니를 타박했다. 다른 애들은 벌써 밥 다 먹었는데 왜 이제 왔냐고 할머니를 몰아붙였다. 할머니는 온갖 내 투정과 지청구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계셨다. 할머니는 마른 손가락으로 흐트러진 흰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말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부리나케 준비해서 왔다고 했다. 어머니 대신 집안일을 맡아하는 할머니도 항상 바빴다. 급한 마음에 구부러진 허리로 걸을 수 있는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할머니에게는 가깝지 않은 거리를 걸어왔을 것이다.


할머니는 무겁게 들고 온 보자기를 풀었다. 보자기 안에는 동그란 찬합이 세 개 포개져 있었다. 찬 합 두 개는 밥이고 하나는 반찬이었다. 뚜껑을 여니 뚜껑 안쪽에 맺힌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갓 지어 잘 식은 찰밥이 고스란했다. 십자로 칸을 나눈 반찬 찬합에 4가지 반찬이 곱게 담겨 있었다. 누나와 나는 갑자기 배가 고파 밥술을 떴다. 촉촉한 찹쌀밥이 입에 착 달라붙었다. 소풍 때 먹는 어묵 조림도 맛있었다. 어제저녁부터 물에 불려 놓은 마른 명태 무침도 맛있었다. 그렇게 한참 먹고 있는데 고개를 들어 보니 아이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들의 눈길이 왜 이제 밥을 먹지? 세상에! 할머니가 도시락을 가지고 왔어?라고 놀리는 것 같았다. 누나는 부끄러운지 밥뚜껑을 덮어면서 먹었다. 용기를 내어 둘러싼 아이들을 올려다보았다. 아이들의 눈은 밥 먹는 나와 누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아이들 눈이 닿은 곳은 찬합에 담긴 촉촉한 밥에, 네 개로 나뉘진 반찬에 가있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의 눈길은 소풍 때나 먹을 수 있는 맛있는 반찬에 가 있었다.


둘러싼 아이들의 눈에 주눅 들기도 했지만, 밥 술을 떠는 숟가락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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