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점심 메뉴는 메밀국수와 튀김. 동그란 튀김에 사람들의 호불호가 갈렸다. 맛이 없다 부터 애매하다는 평까지 자기만의 느낌과 경험을 살려 비교하고 분석했다. 미식가가 많은 내 동료들에게서, 역시나 맛있다는 평가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그중에 상당히 고민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나다. 보통은 ‘엄청 맛있다’와 ‘맛있다’를 오가는 댓글 알바에 적합한 사람인데, 그 동그란 튀김은 자꾸만 다른 것을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그 맛이 알고 싶다.
맛에서 오는 기시감. 분명 어디서 먹어 본 맛은 단순한 입맛의 소유자에게 까다로운 시간을 선사했다. 맛도 잘 구분하지 못하고 기억력도 좋지 않은 나인데, 아마도 한때는 꽤나 자주 먹어 익숙한 맛인 듯했다.
돈가스 맛 같기도 하고 어린 시절 도시락 반찬 맛 같기도 한데,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아... 이 답답함이란. 장롱 밑에 굴러 들어간 500원이 손끝에 간당간당 닿으면서도 끌어당길 수 없는 느낌이었다.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뻗으면 될 것 같은데, 기억의 끝자락이 쉬이 잡히지 않았다.
어느덧 두 개밖에 남지 않은 튀김. 이 시간이 지나면 영영 떠올리지 못할 거란 뜬금없는 긴장감 속에서 하나를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모락모락. 다행히 어렴풋한 이미지가 가느다랗게 피어올랐다. 햄버거. 그리고 어머니.
그 맛은 어머니가 해주신 햄버거 맛이었다. 어린 시절 별식으로 종종 해주셨던 수제 햄버거. 정확히는 햄버거 속에 든 패티 맛. 그 맛이었다.
수제 햄버거라고 거창한 것은 아니다. 다진 고기를 이런저런 채소와 버무려 만든 패티를 양배추 샐러드와 함께 빵 사이에 넣은 것이 다다. 햄버거 빵을 구할 수 있게 되어, 빵 모양이 동그랗게 변한 것 말고는 업그레이드 된 적이 없는 햄버거. 그렇게 나는 누군가는 밍밍하다고 할 어머니의 햄버거를 떠올렸다.
문득, 그리움
문득 그리웠다. 언제 한 번 해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조각을 들어 입에 넣으려는데, 못내 아쉬웠다. ‘조금 더 퍼올 걸’. 이런 날 식탐을 자제하다니. 퍼도 후회 안 퍼도 후회다.
그리고 불현 듯, 생각이란 녀석이 “나중엔 더 이상 맛볼 수 없을 어머니의 햄버거”란 타이틀로 감성을 불러 일으켰다. 이놈의 감성은 부른다고 벌떡 일어나 분위기를 잡는다. 그리고 뜬금도 없던 두 녀석의 콜라보로 어머니의 부재, 이별이라는 종착지에 다다랐다.
기억해낸 시원함 보다 먹먹함이 밀려왔다. 잠시 떠올리기만 해도 보고 싶은 얼굴인데, 나중에 그 그리움을 어쩌지? 어? 이게 뭔가. 갑자기 거침없이 눈이 뜨거워졌다. 아. 마흔이 되더니 호르몬이 제멋 대로다. 시든 때든 없이 과몰입이다. 평소 일을 그렇게 할 것이지. 쩝.
급히 고추냉이가 잔뜩 풀린 메밀국수를 입에 처넣었다. 코끝이 찡해지며 눈물이 찔끔 났다. 아니. 눈물이 찔끔 나며 코끝이 찡해진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눈물이 났고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더 살아 보아도 적응되지 않는 것
이렇게 마흔이 되어도 이별과 부재에 대한 쓸쓸함은 익숙하지 않다. 어째 예전보다 더해진 것 같기도 하다. 생각만으로도 헛헛해진다. 가는 세월을 잡을 수 없다는 게 서글프다. 이러고 싶진 않은데, 어머니 생각엔 뾰족한 수가 없다. 눈물 구멍이 하이패스다.
누군가는 맛없어 하는 이 맛을 나는 언제가 그리워할 테다. 그것은 맛의 기억을 넘어 어머니의 기억으로 치달을 테고 미소와 함께 눈물지을지도 모르겠다. 아. 자꾸 생각하니 좀 그렇다. 아직 곁에 계신데 조금 센티해지고 싶었나 보다. 워워. 이정도면 됐다. 서글픈 생각은 여기까지.
주말에 어머니. 아니 우리 엄마를 보러 가야겠다. 잡을 수는 없지만 세월에 함께 담겨 좀 부대껴야겠다. 오래 기억되고 금방 떠올릴 수 있도록. 그리고 가능할 것 같진 않지만 조금은 덜 헛헛해지도록. 맛있게 먹고, 함께 웃고, 오래 보며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 소중히 여기며, 감사히 여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