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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햔햔 Aug 10. 2021

주식 투자로 벤츠를 산 후배를 보고 허무주의자가 됐다.

[주식 투자 뒷담화 에세이] 허무'주의'자 되기



늦은 시간까지 잔업을 하고 집까지 태워 주겠다는 후배의 차를 탔다. 몇 달 전 구매한 벤츠는 날렵한 맵시를 자랑하며 회사 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 차문을 열었을 때, 문 아래로 떨어지는 벤츠 엠블럼 불빛은 늦은 밤 어둠을 밝히는 동시에 내 마음에 작은 그늘을 만들었다.


후배는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해 온 도전적인 친구다. 언젠가 만난 그의 아내 역시 긍정적이고 아는 이 하나 없는 먼 타지로 내려올 결심을 할 정도로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서울이 그리워 퇴사하는 직원들도 있는 것을 보면 서울을 등지고 내려왔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아무튼 이 둘의 긍정적이고 대범한 면이 코로나 국면에서 빛을 발했던 것 같다. 자세히 캐묻지는 않았지만 제법 크게 투자했고 차를 바꿀 만큼 큰 수익을 거뒀다고 했다.


이제 이쯤에서 나는 조금씩 커져 가는 마음의 소리에 시달리게 된다.


'나는 뭐했지?', '노력해봐야 소용이 없잖아..'


저 앞에서 어서 오라며 손 흔드는 무엇이 보인다. 어렴풋이 그의 가슴팍에 '허무'라는 명찰이 보인다. 큰일 났다. 아아, 나는 이렇게 허무와 절친이 되고 마는 것인가.


노력과 결과


이래선 안 된다. 이러다 보면 필시 이상한 결론에 다다르고 만다. '뭐 한다고 공부했지?', '노력이 아무 짝에 쓸모가 없잖아!', '나는 왜 이런 고민을 하고 있지?'. 그러다 끝내 '나는 왜 사는 거지?' 까지는 아니지만 그 언저리까지 가고 만다. 그 무섭다는 허무감이다.


그간의 내 노력과 시간을 무가치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결과에 도달하면 참으로 허탈하다. 정말 난 무엇을 위해 그렇게 달려왔던 걸까. 아.. 인정할 수 없다. 하지만 현실이다. 눈앞에 버젓이 드러나 보이는 현실. 그렇게 현타가 찾아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분명 노력했고 반성도 했고 갱생도 한 것 같은데, 왜 신들은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는 것인가 말이다. 부처님, 하나님, 조상님, 모두에게 빌어서 혼선이 있었던 것인지 많은 것이 뒤죽박죽이다. 이뤄진 것은 없고 가까워지기는커녕 자꾸만 뒤로 밀려나는 느낌이다.


서둘러 벗어나야 한다. 이런 허무감을 방치하면 안 된다. 친해지면 두고두고 찾아 올 녀석이다. 그런데 자꾸 손 흔드는 저 허무와 가까워진다. 나는 어쩌면 좋을까. 그냥 콱 절친을 맺어 버릴까. 혹시 좋은 녀석일지도 모르지 않나. 갈피를 못 잡는 생각에 마음이 요동친다.


그때였다. 어느새 집 앞에 다다른 후배가 내게 말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감사했습니다."


그제야 내가 왜 이 늦은 밤까지 일을 하고 이 친구의 차를 탔는지 생각이 났다.


오늘 회사에서 이 친구는 눈물을 흘렸다. 잘해보려고 했던 작은 행동이 생각지 못한 큰 사고가 될 뻔한 탓에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몇 시간 동안 지옥을 경험한 그는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천당으로 끌어올려졌고, 후회와 안도와 감사의 눈물을 쏟아 냈다. 서른 살이 넘은 남자 사람의 눈물은 찡한 뭔가가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에 적잖이 놀라고 당황했던 그의 한결 편안해진 표정을 보고 있자니, 세상 일 참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력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도 아니고 실수가 언제나 나쁜 결과로 귀결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또 한 번 목격하면서,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허무주의자 되기


생각해보면 살아오면서 원했던 걸 내가 원하는 시점에 내가 원하는 만큼 가져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 모든 것이 내 노력의 부족함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체로 흡족하지 않았고 부족했으며 한참 늦었다.


그럼에도 반대의 경우도 적지 않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연필을 굴려 찍었던 문제가 맞았고 잠시 판단력이 흐려졌던 회사와 나이팅게일의 마음을 가졌던 아내에게 간택을 받은 것은 노력에 비하면 예상치 못한 과분함이었다.


경험적으로든 이론적으로든 원하는 결과를 이뤄내는 것은 애초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현실에서 노력하면 쟁취할 수 있을 거란 '희망'에 '실망'을 많이도 했다. “내가 들인 노력이 얼만데!!” 기회비용에 대한 자동반사적인 셈법은 이제 그만해야겠다. 자꾸 다시 셈해봤자 자꾸 틀릴 뿐이니까.


후배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다시 허무를 마주하니 좀 전엔 보지 못했던 빨간 경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주의"라고 커다랗게 적혀 있는 경고판.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옆에 서 있는 '허무'는 반갑게 손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오만상을 쓰며 혼신을 다해 손을 내젓고 있었다. 이쪽이 아니라는 듯, 너는 절대 오지 말라는 듯이.


그럼 그렇지. 내가 허무와 절친이 될 리가 없다. 그러기엔 가진 것이 너무 많지 않은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친절함과 남을 부러워하는 부러움과 상대와 비교하는 시기심과 나도 꼭 해야겠다는 욕심이 그득한데 허무라니. 괜한 걱정이었다.


허무주의자가 될까 걱정했는데, 허무‘주의’자가 됐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과속주의’, ‘추락주의’ 푯말처럼 어딘가 서있어야 할 것 같은데, 이 글이 적당한 위치인지 모르겠다. 부디 모두의 허무함에 주의를 환길 시킬 수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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