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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햔햔 Jun 21. 2022

욕을 듣다가도 웃는데요 뭘...

언제든 웃을 수 있다는 위안



전라도 사투리로 처음 욕을 들은 것은 자대 배치를 받고 나서였다. 육군으로 입대한 나는 파주의 한 부대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는데, 내무반을 배정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이 터졌다.


당시 왕고(내무반 최고참)는 작고 땅딸막한 전라도 사람이었다. 귀염상의 왕고는 여느 말년의 병장들처럼 부드러운 언행을 보여줬다. 그런데 어느 날 내무반 전체가 기합 받는 일이 생기면서 준사회인으로 지내고 있던 왕고가 군인으로서의 본 모습을 드러냈다.


스물 두 평생 그렇게 스토리가 긴 욕은 처음이었다. 처음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용 자체는 참혹하여 그대로 적을 순 없지만, 당시 내가 받은 느낌만 전해 보자면 이런 뉘앙스의 이야기였다.


“화장실에서 일을 보느라 움직일 수 없는 너의 머리카락을 조금 많다 싶을 정도로 뽑아서, 네가 마시려고 했던 너의 최애 커피에 그 머리카락을 담갔다가, 네가 가장 좋아하는 흰색 티셔츠에 차마 보기도 민망한 그림을 발로 그릴 것이다.”


제법 잔인한 표현이 들어간 욕임에도, 말도 안 될 것 같은 말이 욕으로 승화되는 것을 경험하며 긴장을 하기 보단 감상에 젖어 들었다. 짧고 억센 경상도 욕만 듣고 자라서인지 적의를 느끼기도 힘들었다. 말은 길어지면 힘을 잃는다더니, 그래서인지 나에게 그 욕은 의도와는 다르게 신선했고 흥미로웠다.


딱 그 정도였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그만 이야기에 심취해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이런...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아.. 나는 어쩌자고 욕을 듣고 즐거워하는가. 나는 나의 미친 짓을 대번에 감지했고 스스로도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한 번 터진 웃음은 쉽게 잠재울 수 없었다. 입 꼬리가 자꾸 올라갔고 눈은 반달이 되었으며 자꾸 웃음이 삐져나오려는지 코와 입술이 주기적으로 벌어지며 크크와 프프 소리를 내고 있었다.


모두가 쳐다보고 있었지만 표정 관리는 이미 내 소관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자꾸 내 머릿속에서 웃음을 강요했다. 매 순간 웃음을 잃지 말자는 교훈이 들어맞지 않는 순간이 있었다면 아마도 이 순간이 유일하지 않았나 싶다.


전체를 대상으로 욕을 쏟아 내던 왕고는 잠시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상황 파악에 나섰다. 


‘뭐지? 저 미X놈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의 생각을 알 수 있었고 내무반의 모두가 무언의 합창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눈치 없이 웃게 만들었던 잠깐 나갔던 눈치는 바로 돌아와 제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이미 한참 늦어버렸다.


180도인지 360도인지 구체적이진 않았지만 돌았냐는 질문과 함께 왕고가 내 앞에 와서 섰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든 돌지 않았기에 아닙니다!! 하고 고함을 질렀고 아니라는 내 대답에도 왕고는 돌았네... 돌았어.. 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나는 가만히 앉아 돈아이가 되었고 내 앞에 따라 잡기 힘든 랩 같은 무수한 욕이 떨어졌다. 욕이 떨어졌다고 하는 것은 욕 자체가 가져야 할 위협이 내 귀에 조금도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뭔가 바로 와 닿아야 긴장도 하고 위협을 느낄 진데, 나는 지나치게 신선한 충격에 감탄이란 것을 하고 있었다. 마치 쇼미더머니를 보며 잘 알아듣지 못하는 가사에도 라임과 비트에 매료되는 것처럼.


‘욕이 이렇게 리듬감 있고 찰질 수가 있다니...’

‘욕 속에 저런 표현과 이야기를 싣다니...’


내 머릿속에는 이런 류의 생각이 가득 찼고 잘못했다는 마음보다는 혹시 날아올지 모를 손이나 발에 대비하자는 마음뿐이었다.

나는 분명 어디를 까이거나 얼차려를 받을 것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행히 나는 갓 자대배치를 받은 노란 견장을 단 이등병, 속칭 노란 병아리였기 때문이다. 이 노란 견장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햇병아리라는 상징으로 이 시기에는 군이라는 세상물정을 모르니 잘 돌봐줘야 한다는 관심의 요구와 잘못 건드리면 큰일 날 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탈영 같은 극단적인 사건사고를 막기 위해 적응할 때까진 좀 봐주자는 군의 시스템이었다.


열불이 난 왕고의 빗발치는 욕 레퍼토리에서 무사히 웃음을 참은 나는 괜히 나 때문에 싸잡혀 욕을 먹은 바로 위 고참에게 끌려 밖으로 나왔다. 바로 위 고참은 두 달 먼저 들어 온 부산 사람으로 나이는 나보다 한 살이 적었다. 


내무반에서 나를 끌어내면서 잡아먹을 것처럼 으름장을 놓았던 고참은 내게 담배를 하나 건네며 말했다. 


“내도 처음엔 이기 무신 말이고? 했다 아이가.. 

 분명 욕인데 욕 같지가 않은 기라. 하... 

 괘안타. 그래도 마. 다음에는 조심하그래이...”


어린 사람이 이해심이 많았다. 무슨 다단계로 욕을 들어야 하나 싶어 억울해지려던 나는 조금 감동받았다. 그리고 그 이해심 많은 고참과 티격태격하며 그런대로 재미나게 군 생활을 이어나갔다.


가만히 있어도 숨이 가빠지는 긴장과 걱정으로 가득 찼던 군 생활은 그 이후 빠르게 안정감을 찾아갔다. 바닥을 치고 시작한다는 것은 더 이상의 큰일을 만들래야 만들 수 없음 뜻했고, 그런 최악의 여건은 뜻하지 않게도 편안함을 가져다 줬다. 그리고 웃음 한 번으로 돈아이가 된 나를 보러 오는 다른 내무반 선임들과 친해지며 군대에서도 관심과 정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욕이 웃음이 되고 돈아이가 관심을 받았던 그때. 참으로 다행이었던 그때를 떠올리며 세상사 참 알 수 없다는 걸 새삼 되새긴다. 그리고 잘 풀리지 않는 지금의 상황과 부대끼는 마음에 그때의 눈치 없는 웃음을 불러내어 살살 문질러 본다.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웃음을 흘릴 수 있는 것이 사람임을 기억할 때, 어쩐지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리고 그 차분해진 마음이 가벼운 미소를 지을 수 있는 힘을 만들어 낸다. 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물레방아를 굴리듯 기억에서 끄집어낸 추억이 이렇게 또 내 삶을 굴러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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